색안경

색안경 쓰고 보지 마시라고요

라는 표현이 있다. 말 그대로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상황을 판단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오래된 격언처럼 쓰이고 있지만 인터넷을 뒤져봐도 도무지 유래를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선글라스가 국내에 선보이기 시작한 이후일 테니 개화기 정도쯤이 아닐까 예측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선글라스 없이 밖을 다니기가 힘들었다. 물론 다닐 수는 있지만, 해가 떨어질 때까지 상당한 짜증을 감수해야 했다. 그곳은 한국보다 태양에 훨씬 가까이 있는 건지, 대낮이면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살이 마치 사이클롭스의 옵틱 블래스트 같았다. 대충 선크림을 바르고 나가도 얼굴이 거북이 등짝처럼 바짝바짝 갈라지는 느낌을 받게 되고, 동공을 자극하는 햇빛 때문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게 된다. 인상을 많이 쓰는 배역을 맡게 되는 배우가 있다면,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선글라스 없는 생활을 추천해주고 싶을 정도다. 그 이후는 계속 노인 역할만 맡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 심지어는 그늘이 지는 날에도 – 상당히 많은 사람이 선글라스를 쓰고 다닌다. 실내에 들어와서 커피를 주문할 때에도 마치 포스 앞에서 태양이 주문을 받는 것처럼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데, 자신이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습관적으로 쓰고 다닌다.

머리도 눈동자도 모두 옅은 갈색인 프랑스 친구에게 선글라스를 쓰는 이유를 물어보니,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햇빛이 강한 날에는 주변이 하얘지면서 잠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나는 예쁘게 보이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는 거야.’라고 뻔뻔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과장해서 이야기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걸 보면 선글라스는 애초에 생존을 위한 도구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너 혹시 색안경 쓰고 보는 거 아니야?’ 같은 표현은 캘리포니아나 유럽 지역 사람들이라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미리 조심하기 위해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상황을 맞는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다면 그 지역 어딘가에서는

‘너 왜 일을 그렇게 하는 거야. 제발 모든 일을 색안경 쓰고 볼 순 없겠니?’

라고 혼내는 상사도 있지 않을까? 만약 같이 일하는 사람이 한국 사람이라면 속으로 ‘그래, 한번 네가 원하는 대로 색안경 쓰고 봐 주겠어!’라고 결심하는 상황이라면 조금 재미있을 것 같다. 어쨌든, 자외선은 눈에 안 좋으니 서울에서도 늘 선글라스를 가지고 다니기를 권하고 싶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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