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의 쇼츠를 넘겨보다가 화물트럭의 짐칸에 기린이 실려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고속도로였는데 갑자기 고가도로가 출현했고 기린은 그것에 부딪쳤다. 기린의 긴 목은 허공에서 꺾이듯 흔들렸고, 이어 몸이 크게 휘청이더니 차 밖으로 밀려 떨어지고 말았다. 뒤차의 블랙박스가 담고 있던 그 장면은 도로에 누워있는 기린 앞에 멈춰서는 것으로 끝나고 있었다. ‘가는 길에 고가가 있다는 것을 미리 확인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바로 ‘아차 또 AI한테 속았구나’하는 나.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은 아니다. 요즘 영상생성 기술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숏폼 피드는 점점 사람이 만든 영상과 구별할 수 없는 생성형 영상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은 비단 영상뿐 아니라 음악, 기사 등 디지털로 생산가능한 콘텐츠 영역이라면 어디서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는 일인 영화제작이 꿈은 아니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딥페이크라는 용어는 꽤 오래전부터 사용되었지만, 이제 페이크 음성이나 영상이 실시간으로 상대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아시는지? 이 기술에 무언가 기대되기 이전에 등골이 먼저 오싹해지는 건 나뿐일까? 여러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발상일 거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우려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나까지 더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것보다도 개인적으로는 존재, 혹은 아이덴티티에 대한 혼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확인하고 있을까? 보통 내 옆에 있으면, 내 손에 만져지면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실재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시골에 사는 부모님이라면 어떨까? 그분들과는 가끔 전화연락만 할 뿐이다. 가끔 영상통화를 하는 해외에 사는 친구라면 어떨까? 아마 대부분은 그들이 실재한다고 생각할 거다. 그렇다면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펜팔 – 이런 게 지금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친구라면 어떨까? 그런 사이라도 대부분은 그들의 존재를 크게 의심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특정 대상의 기존 기억에 여러 간접적인 추가정보를 더해 그들의 형상을 현재화한다. 기억 속에서 그들의 시간을 더한다. 그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하며, 그런 이유로 우리는 그들이 존재하고 실재한다고 느낀다.
현재의 인공지능 및 생성형 서비스의 수준이라면 위에서 이야기한 모든 간접 상호작용을 실시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이야기는 마음만 먹으면 인생 내 대부분의 상호작용을 모두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된다면 나는 이전과는 다르게 살게 되는 걸까?
수년 전에 한동안 해외에서 혼자 지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부모님도, 가끔 만나던 친구들도 모두 만날 수 없었고, 인터넷 혹은 통화로 가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의 실재에 대한 의심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부모님의 안부전화나 가끔 친구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전해주는 영상통화만으로도 그 시기를 잘 견딜 수 있었다.
인류는 여러 이유로 점점 사람을 마주하기 힘들어질 거다. 매장에는 키오스크의 불빛뿐이고, 콜센터에는 합성된 음성만을 들을 수 있고, 커피는 기계팔이 건네주는 세상. 가족의 개념도 점차적으로 축소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과연 어디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환경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과거와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실재와 허상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생활 안에서 우리는 온전하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일자리의 소멸이 아니라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따뜻함과 존재가치가 위협받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은 인류의 정신적 안녕과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생활의 어려움과는 또 다르게 인류를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 이런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의견에 반하지는 않지만, 이런 상황이 서글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주변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살아있지만 점점 덜 실재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