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끝자락에 내리는 비는 가을로 가는 스위치를 내리는 손가락 같다. 선긋기를 하듯, 장작을 패듯, 계단을 오르듯, 여름과 가을을 수직 이등분한다.
너랑 영화 볼 사이는 아님,
쩍 갈라진 나무 그루터기,
나 지금 막 2층에 도착.
이건 꽤 오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로 10월 즈음의 시민박명市民薄明1) 시작 시간이 오전 6시 근방이라는 사실만큼이나 믿을만하다. 이 비가 그치면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이제 가을이네.’ 하게 될 테지. 다들 알게 되다니 조금 재미없긴 하지만…
오래전 런던에 갔을 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도착 때부터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우산이 없어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피해 근처 스타벅스 안에서 길거리를 내다보고 있는데, 우산을 쓴 사람들보다 쓰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사람들은 머리에 후드를 뒤집어쓰거나 우비를 입고, 혹은 무방비 상태라도 개의치 않으며 거리를 걸었다. 물론 우산을 쓴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스타벅스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옷의 빗물을 툭툭 털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 자리에 앉는다. 사실 그런 장면은 밴쿠버에서도, 샌프란시스코에서도 흔하다. 얼마 전 해외에 나가 국내 굿즈를 판매했던 예능프로에서 유독 우산이 안 팔렸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우산이 생활 필수품이다. 마치 비를 피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 것처럼 한 방울도 맞지 않으려 노력한다.(사실 나도 일 년 내내 작은 우산을 가방에 넣고 다님) 사실 의외로 그것이 인간의 도리일 수도 있지만, 비를 피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꽤 많은 날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일 년에 백일 이상 비가 오니 말이다. 물론 비가 오는 날 피크닉을 갈 수는 없겠지만 산책 정도는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 한번 후드를 뒤집어쓰고 마트에라도 다녀오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떨까?
그건 그렇고, 내일은 딱 해가 떠있을 시간에만 비가 온다고 한다. 제기랄…
1) 시민박명市民薄明: 시민들이 야외활동이 가능하며, 신문을 읽을 수 있는 밝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