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얻기

가기 전에는 금방 살 집을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착한 지 2주가 다 되어가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샌프란시스코에 하우징 수요가 많은 것과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집을 구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상승효과를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샌프란시스코의 이곳저곳을 꽤 많이 돌아다녀보게 되었는데, 서울 면적의 1/5 밖에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지역 간의 다양성은 뉴욕을 능가할 정도다.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그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번화가인 마켓 스트리트 근처 파이낸셜 디스트릭트는 사람이 많아서(노숙자도 많음) 늘 시끌벅적하기 때문에 집 안에서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피하는 게 좋다. 마켓 스트리트와 비슷하게 여행책자에 많이 소개되는 노스비치 지역도 관광객들로 늘 붐비지만, 한두 블록 안쪽으로 들어가면 생각 외로 조용한 편이다. 차이나타운과 가까운 콜럼버스 애비뉴 근처는 렌트가 저렴한 대신 방이 작고 부엌이나 화장실이 공용인 곳이 많고, 롬바드 스트리트퍼시픽 하이츠 쪽은 한적하고 깨끗하지만 렌트비용이 다른 곳보다 조금 높은 편이다. 소마는 AT&T Park(지금은 Oracle Park로 이름이 바뀐 바닷가에 있는 야구경기장으로, 홈런을 치면 공이 바다에 떨어짐)가 가까우니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고려해 볼 만하지 않을까?


어쨌든, 빨리 집을 구하지 못해서 호텔을 일주일 연장해야 했는데, 리셉션에 내려가 보니 한국에서 예약할 때보다 가격이 두 배가 되어있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다음 주에 근처에서 진행되는 세일즈포스닷컴(salesforce.com: 고객 관계 관리 솔루션을 중심으로 한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의 행사 때문이라고 한다. 샌프란시스코는 테크놀로지 서비스 기업이나 스타트업들이 많아서(구글 같은 대기업부터 트위터나 에어비엔비 같은 스타트업들도 다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나 지점이 있음) 테크 행사로 인한 유동인구가 엄청나다. 덕분에 유명한 행사가 개최되면 도시 전체의 호텔 방값이 일제히 오르는 현상이 벌어진다. 아무리 그런 상황이라도 나는 아직 집도 구하지 못한 불쌍한 상태(게다가 세일즈포스닷컴의 세미나에도 참석하지 않을 예정)인데, 방값까지 두배로 지불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래도, 내가 먼저 방을 사용하고 있었잖아. 연장하면 당연히 처음 계약했던 가격으로 맞춰줘야 하는 것 아냐?” 하고 항의를 한번 해봤는데, 리셉션의 담당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 되네(내가 보기엔 말이 안 됨) 잠깐만 기다려봐” 하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한다. 

도대체 어디가 Make sense 하다는 거지? 내가 말하긴 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잖아. 하지만, 전화를 마친 담당자는 서류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일주일 더 연장하면 돼?” 한다. 

Absolutely! (맞습니다) 

영어에는 존대가 없지만, 머릿속으로는 존댓말을 하고 있었던 나.

그렇게 일주일을 무사히 연장하고 더욱더 열심히 집을 보러 다니다가, 드디어 퍼시픽 하이츠 근처에서 살고 싶은 집을 만나게 되었다. 빅토리아 풍의 고즈넉하고 아담한 집이었는데, 재펜 타운 근처라 마트도 가깝고, 집 앞에 꽤 큰 공원도 있고, 한 블록만 올라가면 길 건너로 바다도 보였다. 무엇보다 주변이 조용하고 깨끗한 게 마음에 들었다.

오픈하우스 시간에 맞춰 집 앞으로 가니 현관에 ‘열려있으니 밀고 들어오세요’라고 쓰여있는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람 좋아 보이는 어르신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의자에서 책을 읽고 계셨다. 인사를 건네자 환하게 웃으시며 입주 신청서를 건네주시고는 집과 관련된 여러 설명을 해주신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집주인 할아버지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다.
‘나는 야구를 좋아하거든. 은퇴하고는 야구장에서 안내 요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야구를 실컷 볼 수 있어서 회계사로 일할 때보다 더 좋다네.’ 하며 호탕하게 웃으시는 어르신. 나는 회계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고 야구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얼마나 더 좋은 건지 감도 오지 않았지만, 갑자기 영화 ‘머니볼’에서 구단장 빌리가 운영에 새로운 방식을 적용하며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I’m going to see this through, for better or for worse.
잘 되든 아니든 한번 밀어붙여 볼래

회계사보다 야구장 안내요원이 얼마나 더 좋은지를 논리적으로 계산할 필요는 없다. 집주인이 좋다고 하면 나도 좋아해 주면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우물쭈물거리지 말고 바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빌리도 말했잖아. 나는 집을 구해야 한다. 여기에 살고 싶다. 선택받아야 한다! 나는 주인 어르신을 따라 같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정말 야구장 안내요원이 최고네요. 너무 부러워요.”

최고라고 이야기한 것이 조금 진정성이 떨어져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인 어르신이(다른 집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도 그랬겠지만) 인자한 목소리로 서류 접수방법을 알려주셨다.

“이메일로 서류를 작성해서 보내주게나. 샌프란시스코에 온 것을 환영하네.”


물론 따라 웃어서만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드디어 3주 만에 집을 구할 수 있었다.

epilogue.

Hi,
Was at the apartment yesterday to check things out.
어제 한번 살펴보러 아파트에 갔었네.
Noted that you didn’t even have a starter roll of toilet paper!
자네는 아직 화장실 휴지조차 준비가 되어있지 않더군!
Will drop off a couple of rolls of toilet paper, paper towels, soap and kleenex.
내가 화장실 휴지 두 개, 종이 타월, 비누 그리고 크리넥스를 가져다주겠네.
Your job to acquire them on your own in the future 🙂
앞으로는 자네가 그것들을 준비해야 할 거야. 🙂
Will drop them in the late PM.  If you are not there, will leave them at your door.
오후 늦게나 갈 텐데, 만약 그때 자네가 없다면 문 앞에 놓아두겠네.
Oh, by the way, no trouble for us to do this.  
아. 그런데,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돼.
Diane and I will be driving in to go to dinner and movie at the Kabuki.
다이앤과 나는 집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가부키(제팬 타운에 있는 극장)에서 영화를 볼 생각이었거든.
(I said it was our favorite place!)
(내가 좋아하는 곳이라고 말했잖는가!)

Welcome to our building.
우리 빌딩에서 살게 된 것을 환영하네.

은퇴 후에 느긋하게 외식을 하고 영화를 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 사는 게 너무 정신없어 짜증 날 때면 밥 어르신이 계약 후에 보내주었던 이 메일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요즘도 가끔은 재팬 타운에서 식사를 하고 가부키에서 영화를 보시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 왠지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게 될 때가 올 테니 말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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