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선택하는 기준과 ‘나를 부르는 숲’

여러분은 책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시나요? 좋아하는 작가? 혹은 장르? 아니면 친구나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본 추천을 기준으로 고르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사실 저도 별로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책을 선택합니다. 어떤 작가가 마음에 들면 내비게이션을 그에게 세팅하고는 몇 달이고 연대기를 따라 훑기도 하고, 서점에 가면 좋아하는 장르 가판 앞에서 이것저것 한두 페이지씩 읽어보며 고르기도 하죠. 그런데, 어느 정도 범위가 좁혀졌을 때는요? 보통 추천이 아닌 경우에는 대부분 두세권 안에서 한 권을 선택해야 하잖아요? 사실 저는 그때 사용하는 독특한 선택 방법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책의 두께를 보는 거예요.

보통 270페이지 전후면 4×6판(소설의 일반적인 판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을 기준으로 일반적인 책의 표준 두께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보다 얇으면 조금 부족해 보이고, 많으면 두껍다는 느낌이 들죠. 저는 우선 잘 고르지 않게 되는 것이 바로 270페이지 전후가 되는 표준 두께의 책입니다. 가장 선호하는 것은  그것보다 조금 두꺼운 책이고요. 만약 사야 하는 책이 지식을 전달하는 서적이나 자기 개발서(거의 안 읽긴 하지만)라면 270 페이지 근처의 책들은 아예 선택하지도 않습니다. 방법서나 자기 개발서의 경우에는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이론이나 논리가 존재하는데, 세상에는 그게 새발의 피만큼 만 있어도 책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데요. 정말 더럽게 많다니까요?

책 한 권을 읽는데 적어도 두세 시간은 들여야 하는데, 별것 아닌 내용을 가지고 책 한 권 분량으로 늘려 쓴 책들을 만나게 되면 정말 짜증이 머리 끝까지 삐죽삐죽 올라옵니다. 할 말이 더는 없지만 분량을 만들기 위해 맥락에도 안 맞는 내용을 밀가루 반죽처럼 챕터 뒤에 늘려 붙이는 작가가 옆에 있다면 니킥을 옆구리에 지르고 싶어 진다고요.

소설의 경우에도 비슷합니다. 뭔가 더 이상 아이디어가 없어서 밥 먹는 장면이나 뒷산에 오르는 장면 같은 것을 중간중간 붙여 늘리는 것도 짜증 나지만, 뒷심이 부족해서 갑자기 떡밥 회수도 안 한 상태에서 훅 끝내버리는 경우에도 열 받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어. 책 한 권 분량은 됐잖아?’

이제 대충 마무리해볼까 하고 쓱 정리하는 작가가 생각보다 있습니다. 사실 끝까지 항상심을 유지하는 게 보통 내공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용두사미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책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지구력은 퀄리티를 위한 기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책 소개를 하려다가 이상한 이야기를 너무 오래 하고 말았는데,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은 친구가 빌려줘서 읽게 되었지만, 두께도 제 조건에 딱 맞아떨어지는 책이어서 기대가 엄청났죠. 사실 빌 브라이슨에 대한 신뢰는 친구 여럿의 추천과 이전에 읽었던 ‘발칙한 영국 산책’ 덕에 꽤 높기도 했고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빌 브라이슨은 미국에서 태어났다가 영국인과 결혼하여 20년 동안 영국에서 살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15년을 살다가 영국으로 돌아가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해요. 덕분에 유럽, 특히 영국에 대한 지식이 상당해서, 관련 집필도 꽤 많이 했죠.

이 책은 미국 조지아 주에서부터 메인 주까지 이어지는 총 3,500킬로미터의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친구와 함께 종주하며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기행문 성격을 띤 에세이예요. 조용한 곳에서 혼자 읽어도 육성 터지게 웃게 될 정도로 문장 하나하나가 위트 넘치고, sarcasm 충만하며, – 무엇보다 – 재미있습니다. 페이지가 많아서 ‘한숨에 읽었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한 서너 번 만에 다 끊어 읽었을 정도로 술술 읽혀요. 그와 그 친구, 카츠의 위태위태한 트레일 트레킹 스토리는 가끔 마주하게 되는 특별한 만남, 손에 땀을 쥐는 사건, 생각지도 못했던 경이와의 조우로 가득해서, 기회가 되면 나도 한번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트레킹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물론 중간에 이런저런 애팔래치아 트레일 히스토리에 대한 설명이나 학술적 이론을 설명하는 부분은 조금 지겹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학습지 정답 해설 부분을 보는 느낌으로 천천히 읽으면 나름 꽤 흥미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도시 생활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자연의 경이로움이라던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힘이 그의 노련한 필력을 통해 – 마치 내가 트레킹을 하고 있는 것처럼 – 생생하게 전달된다는 게 장점입니다. 혼자만 경험하긴 아깝다는 그런 느낌이랄까?

재미있는 부분을 한번 소개드려 볼까요? 트레킹을 하다가 그들은 메리 앨런이라는 여행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트레킹의 베테랑으로 그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합니다.

그녀는 내 텐트를 보고 “스타십(상표 이름) 텐트야?” 하고 물었다.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큰 실수를 했군. 텐트를 파는 가게 점원들은 네가 어떤 텐트든 반드시 살 거라는 걸 알았나 보지. 얼마 줬는데?”
“몰라”
“너무 많이 줬어. 그리고 3 계절용 텐트를 샀어야지.”
“3 계절용이야.”
“내가 이렇게 말해서 안되었지만, 3월에 3 계절용 텐트도 없이 여기 오는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야.”
“3 계절용 텐트라니까.”
“아직 얼어 죽지 않았으니 다행인 줄 알아. 너 빨리 돌아가서 네게 그 텐트를 판 녀석을 한 대 갈려주라고. 무식하게 그런 텐트를 팔다니.”
“날 믿어줘. 3 계절용 텐트야.”
그녀는 또 한 번 코를 푼 뒤 머리를 세게 흔들면서 “저게 3 계절용 텐트야.”하고 가츠의 텐트를 가리켰다.
“내 것과 똑같은 거야.”
그녀는 다시 한번 휙 쳐다보더니 “어쨌든, 오늘 얼마나 걸었어?”라고 화제를 돌렸다.

400페이지나 되는 이 책을 느긋하게 읽어보실 여유가 있는 분들이라면 꼭 추천드려보고 싶네요.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입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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