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디바이스를 좋아한다. 랩탑, 게임기, 스마트폰, DAP, 자전거용 미등, 하여간 뭐든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 종류의 기기들이 꽤 많은 편이기도 하다. 왜 좋아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대충 ‘이과형이어서 기계를 좋아하는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게임기를 오랜만에 충전하다가 번뜩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디바이스가 아니었다.
나는 충전하는 걸 좋아하는 거였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너무 동물 같은 이유다. 벌이 꽃과 꽃사이를 오가며 꿀을 획득하듯, 내 인생을 기기를 풀 충전 상태로 만드는 것에 바쳐왔던 건가? 조금 더 의미 있고 학구적이며 과학적인 이유를 생각해보려 했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충전하는 걸 좋아하는 게 맞다. 지금 이 작은 오래된 게임기의 배터리 표시가 다시 꽉 찬 걸 보며 입꼬리 찢어지는 걸 봐. 이건 확실하다. 그러고 보면 매일 아침 충전된 스마트폰의 배터리 표시에 든든함을 느꼈다.
디바이스들은 하루 종일 사용했더라도 충전만 하면 언제나 처음 그대로 돌아간다.
풀 파워다.
다시 시작이다.
백 프로에서 또 시작할 수 있다.
나도 비슷했다. 무엇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아무리 찌들었어도, 짜증 났어도, 아침이 되면 별생각 없이 조금은 회복되어 다시 그 일을 이어서 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던 나는 다시 충전된다. 그거면 된다.
며칠 동안 이가 아팠다. 그와 동시에 머리까지 아팠다. 치과의사인 친구는 피곤해서 잇몸에 염증이 생겼다고 한다. 이가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으니 괜찮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계속 이가 아프고 머리가 아팠기 때문에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친구는 신경치료를 시작했다. 측두엽의 일부를 들어내는 해마제거술처럼, 아예 신경을 들어내어 버려 통증을 비롯한 감각을 느낄 수 없게 하는 연명치료. 그렇다고 신경제거술이라 불렀다면 환자들의 반감이 컸겠지. 신경치료라면 왠지 신경이 모두 원상복구 될 것만 같다. 마치 충전처럼 말이다.
치료하는 동안 끌 같은 도구로 잇몸을 긁어대는 소리가 엄청났다. 내 입 안쪽에 저런 소리가 날 정도로 긁을 수 있는 부위가 존재하는구나. 신경치료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그 정도 시간이면 잇몸 전체를 들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쨌든 그 시술 후 치통과 두통은 꽤 나아졌다. 마취가 풀리자 살짝 시큰거리는 건 있었지만, 치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하룻밤을 자고 났더니 통증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마치 충전이 끝난 디바이스처럼…
그러고 보면 의사인 친구가 나를 충전한 거구나. 그렇다면 내가 충전을 좋아하는 이유도 의사들처럼 숭고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누가 뭐래도 오늘 아침은 꽉꽉 채워 충전된 상태다.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