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8-30 일기

지긋지긋한 여름

어제부터 게릴라가 국지전을 하듯, 엄청나게 짧은 시간 동안 상당히 많은 비가 내렸다. 그리고, 아직은 기세가 꺾이지 않은 여름 태양은 족족 그 흔적을 지웠다. 토요일인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그치려나 싶어 자전거를 끌고 나왔는데 여지없이 쏟아지는 비에 온몸이 홀딱 젖어 근처 커피숍에 들어오고 말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도 햇빛은 쨍하게 내리쪼이고 있으니 옛날 사람들이 봤다면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 했겠지. 하지만 호랑이는 번식기에만 짝을 이루며 대부분은 단독생활을 하기 때문에 장가는 어림도 없음.

엘모어 레너드라는 소설가가 자신만의 글쓰기 규칙 10가지를 제시했는데 그중 첫 번째가 ‘날씨 얘기로 시작하지 말라’였다. 나는 대부분의 글을 날씨로 시작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불워 리턴의 ‘폴 클리포드’도 ‘어둡고 폭풍우 치는 밤이었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물론 나처럼 매번 밥먹듯이 떠들어대는 정도는 아님. 대신 나도 글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은 아니니까.

카더가든

카더가든을 아시는지? 요즘 쿠팡플레이의 직장인들에서 열일하고 있는 수염 난 직원이 바로 그다. 개그맨인 줄 아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 사실 그는 뮤지션이다. 독특한 그의 음색은 평범한 노래도 특별하게 만들어버리는 매력이 있다. 원래는 공장 노동일을 하다가 때려치우고 음악가가 되었다는 그는, 음악을 배운 경험은 없지만 기타 연주도 수준급이고 직접 작곡도 한다. 하기 싫을 때 안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하고 싶다고 그걸 덜컥 직업으로 이어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천재다 천재. 세상엔 천재가 너무도 많은 게 문제.

그냥 재미로 보자면 ‘Home Sweet Home’은 지드래곤 보다는 백예린이 먼저고, 백예린보다는 카더가든이 먼저고, 카더가든보다는 머틀리 크루가 먼저다. 물론 곡들은 다 좋음.

장대비

글 중간이니 날씨 이야기를 또 써도 되겠지? 커피숍에 들어온 지 세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갑자기 밖이 저녁 일곱 시처럼 어두워진 채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건재하던 햇빛도 온데간데없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긴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비 맞는 걸 싫어하는 것 같다. 물론 나도 그렇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 물론 비가 많이 오는 곳은 아닌데, 유독 내가 살 때 비가 많이 왔음 – 사람들은 거의 우산을 쓰지 않는다. 비를 잔뜩 맞고 실내로 들어오면 툭툭 대충 털고는 그냥 자리에 앉는다.

그래서 나도 그곳에서는 비를 맞고 걸어 다녔다. 비가 거세게 내려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아무렇지 않게 건물을 나서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버스 안에서는 조금 짜증 났지만, 집에 도착해서 씻고 나면 생각보다 금방 괜찮아진다. 비가 그치면 또 햇빛이 쨍하기 때문에 신발도 금방 마른다. 원상복구가 금방 되어서 타격감이 없는 건가? 어쨌든 서울에 와서는 또다시 우산 아래 숨게 되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신발이 젖는 건 너무 싫음.

단순작업

인형 눈을 붙인다던가, 박스를 접는다던가 하는 일을 나는 정말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단순한 일을 생각 없이 하는 게 상상조차 안 됐다. 학교 다닐 때에도 단체로 무언가를 준비할 때는 반복작업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고 다른 일들을 맡아 했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내가 하는 일은 매번 다르고, 생각지 못한 일이 발생하고, 새로운 방법을 쥐어짜야 하는 것들이었다. 물론 반복업무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런 것들보다 다른 변화무쌍한 일들에 더 집중해온 것 같다.

그런데 최근 뭔가 아주 단순한 동작을 계속 반복해야 하는 일을 얼마동안 하게 되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견딜만해서 놀랐다. 견딜만한 정도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예측가능한 성취감까지도 느꼈다. 마라톤을 하듯, 순례길을 걷듯, 옷의 단추를 채우듯 한걸음 한걸음 진행하는 일. 잔꾀나 트릭으로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언제 저 산에 올라가게 될지 감도 안 잡히지만, 어느 순간 지나왔던 경험으로 그것을 가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90%, 95%, 98% 다가갈수록 도파민이 폭발하는 게 느껴지는, 마치 정규분포처럼 정직한 작업.

물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좋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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