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한국말을 해도 좋아
그녀가 말했다.
영어는 자의든 타의든 꽤 오랫동안 공부해왔기 때문에 알아듣는 게 어렵진 않은데, 말을 할 때는 모국어만큼 미려하지 못해 아쉬울 때가 종종 있다. 그때도 그랬다. 내가 한국어를 쓴다면 좀 더 멋지게 설득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그녀는 위와 같은 제안을 해 왔던 거다.
‘너는 한국어를 사용해도 좋아. 하지만 나는 계속 영어를 쓸 거야.’
처음 봤을 때부터 영어로 대화했기 때문에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었다. 고정관념에 의한 지나친 일반화의 전형적인 예.
‘왜 내가 한국어를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해?’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 그녀는 어렸을 때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모국어는 아니지만 – 한국어까지 유창한 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으니까. 물론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영어를 잘하는 경우는 꽤 많다. 하지만,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한국어를 써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당연하지. 한번 한국어로 제대로 설득해 봐.’
평소에 꽤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편인 나는 머릿속에 이미 구조화되어있던 내용을 하나하나 우리말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여전히 튀어 나오는 건 영어로 이야기할 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초등학생 수준의 문장이다.
‘조금 전하고 큰 차이가 없는데? 너 원래 말을 못 하는 거 아냐?’
억울했다. 약간 당황하고 있는데, 갑자기 과거에 경험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오래전에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중 두 명이 외국인이었다. 그들을 위해 통역사를 두고 순차통역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었는데, 그때도 – 내가 준비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주제에 대해 – 지금처럼 버벅거리며 설명을 했더랬다. 그때도 계속 머릿속에는 ‘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마치 뇌출혈 직후의 환자처럼… 그리고, 지금 나는 그때와 똑같은 생각을 하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이유를 알 것 같아.’
나는 감도 안 잡혔다.
‘그건 네 머릿속의 스위치 문제야. 말할 때는 한국어로 생각했을 테지. 하지만, 내 말을 들을 때는 다시 영어로 사고해야 하잖아. 네 머릿속 어딘가에 있는 그 모드 전환 스위치를 네가 유연하게 작동시키지 못해서 그런거야. 봐. 나도 같은 상황인데, 전혀 문제가 없잖아.’
그건 그랬다. 그녀는 분명히 고급진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그 이후 화제가 전환되는 바람에 ‘어눌한 한국어’에 대한 이야기는 그 정도에서 멈추게 되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계속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치 문제라면 한국어로 말한 뒤 영어를 들을 때에도 문제가 있어야 했는데, 특별히 그랬던 적은 없다. 게다가 과거 비슷한 상황에서는 스위치를 움직일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때는 통역이 있어서 한국어로 의사전달만 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두 상황에서 공통점을 찾아내고 말았는데, 그것은 바로 ‘배려’였다. 과거 발표할 때를 생각해보면, 나는 쉽게 통역할 수 있는 문장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이유로 수사법의 사용을 배제하고, 문장도 단문으로만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단순하고 재미없는 문장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통역은 없었지만, 나는 그녀의 한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어 실력이 낮아도 이해할 수 있을만한 쉬운 문장을 사용했던 거였다. 너무 배려심이 뛰어나니까.
택시 안이 따뜻해서 노곤하기도 하고, 피곤한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고민하기도 귀찮고, 무엇보다도 내가 배려심이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멋진 결론까지 도출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했다.
그 고민의 결과로 영어로 말하는 실력이 변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