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형님이라고 불렸다

얼마 전 미국에서 친구가 와이프와 함께 놀러 왔다. 그때 그들은 사귀는 사이였고, 지금 그의 탄탄한 팔에는 아기가 안겨있다. 꽤 오래전 우리는 학교에서 하루에 열 시간이 넘게 같이 보내고, 샌프란시스코 피어에서 재팬타운까지 두 시간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는 남는 게 시간이었어서 그 정도 걷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그 무서운 텐더로인을 겁 없이 가로질러 다닐 수 있었던 건 근육질의 그 친구 때문이었고, 그는 내게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는 그 호칭이 좋았다. 

그 무렵만 해도 고민이 많았다. 하고 있는 일이 있었지만, 더 큰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뭔가 할 수 있다면 해야 하지 않을까? 너무 늦기 전에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의 실타래에 갇혀버리면 늘 공허하고 불안했다. 그때 그 친구는 내게 큰 힘이 됐었다. 그와 있으면 머릿속의 그 복잡한 생각을 한 번에 떨쳐버릴 수 있었다. 

‘형님, 밥 먹어요.’

‘형님, 집에 가요.’

‘네, 그러면 저는 갑니다.’

그는 늘 명확하고 확실했다. 단순하고 명료했다. 숨김이 없고 정직했다. 학교에 오고, 과제를 하고, 여자친구를 사랑했다. 재미있으면 크게 웃고, 짜증 나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 뒤에는 다른 표정이 없었다. 조르지 않고, 권하지 않았다. 한번 이야기한 것은 번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팔에는 근육이 불룩했다. 


요즘 일을 하면서 꽤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닌, 불가항력적 결과에 대한 문제 제기와 흠집 만들기, 그리고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소모적 에너지 낭비에 지쳐버렸다. 석 달 앞, 한 달 앞만 보는 분위기에서 중장기를 가리키는 비전은 역적이나 다름없었다. 늘 말이 바뀌고, 매번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설명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봤다. 

オヤジ の栄光時代はいつだよ・全日本のときか? オレ は・・・オレ は今なんだ!!
영감님의 영광의 순간은 언제지? 국가대표 땐가? 나는…. 나는 지금이라고!!

이 애니메이션에는 그런 복잡하고 지저분한 관계가 없다. 단지 농구가 좋고, 지금 잘하고 싶을 뿐이다. 매 순간 현재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에 집중한다. 각자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한걸음 옆에서 서로를 응원한다. 가끔은 긍정적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공이 잘 안 들어가고, 리바운드가 생각한 만큼 잘 안 되는 것만이 현안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백만 번의 미세한 피봇팅, 새로운 시도가 있을 뿐이다. 

지난주 화요일에도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다가 지쳐서 대충 정리하고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을 보러 갔다. 친구가 ‘정말 꼭 한 번만 봐주면 안 돼요?’ 하며 추천했던, 숙제처럼 두개골 안쪽에 제목을 적어 압정으로 쿡 찔러놓은 영화. 그 영화가 끝나가는 자정 즈음 나는 다시 한번 모든 스트레스가 쓸려내려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함정일 텐데 거길 왜 가냐는 물음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스타로드.

We’re here to save the life of our friend. That is all.
친구를 구하는 거야. 그게 다야.

친구가 거기 잡혀 있으니까. 그것만으로 이유는 충분하다. 두 번 생각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함께 우주를 지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고, 그런 친구가 위험에 빠지면 구하러 가면 되는 거다. 그 외 다른 고려사항은 없다. 차안대를 한 경주마처럼 일단 친구가 잡혀있는 곳까지 가장 빨리 달려간다. 이후는 거기서부터 생각하면 된다.

그런 가치관의 캐릭터들끼리 아웅다웅하는 모습에 행복해지는 나를 보며 내가 왜 그 친구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만들어낸 상황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그런 사람이니까. 내게 바라는 것도 없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연락을 하는 거다. 그의 연락을 받으면 무조건 시간을 만들면 된다. 다른 생각은 필요 없다.


그렇게 함께 식사를 한 후 밖으로 나온 우리. 그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아이를 어깨에 올린다. 그리고, 와이프의 손을 잡고 터벅터벅 걸어간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봤던 것 같다. 

얼른 또다시 볼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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