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은 겨울이 너무 길고 지겨웠다. 그래서 해가 변한 이후로 계속 봄이 더 기다려졌다. 기다린다고 봄이 오는 시기가 앞당겨지는 건 아니겠지만 애초에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빨리 오길 바라는 것과는 조금 다르니까. 하지만 작년부터 진행해 오던 프로젝트의 이행 즈음이 되고 나니 날씨고 뭐고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마치 사건의 지평선 안쪽에 누워있는 것처럼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그렇게 계단을 오르듯 하루를 딛고 다음날을 맞았다. 눈은 발끝만 바라봤다. 머리는 다음 디딜 곳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 책상 위로 떨어진 햇살이 낯설어 한참을 아무것도 못한 적이 있었다.
‘프로젝트 때문에 봄 안에 제대로 누워보지도 못하고 여름을 맞겠네.’
텅 빈 머릿속에 그 생각만 떠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드디어 지난주 금요일 프로젝트가 끝났고,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은 여름 냄새로 가득했다. 나의 2024년 봄은 2015년 크리스마스이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럴 수도 있구나. 이관이 끝난 날, 나는 한 달 반 만에 환한 낮에 건물을 나섰다.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문을 잡아주지도 않고, 길거리에서 스티커를 붙여달라는 사람도 무시하며, 차안대遮眼帶를 한 경주마처럼 바로 집으로 직진했다. 밥을 먹지도, 컴퓨터를 켜지도, 유튜브를 보지도 않았다. 마치 탈피하는 사슴벌레처럼 옷을 벗고 샤워를 한 뒤 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다음날까지 시체처럼 잠을 잤다.
오후가 다 되어 일어나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리는지도 모를 안개비도, 주변을 압도하는 장맛비도 아닌, 적당한 리듬으로 주변을 적시는 상식적인 비였다. 세상은 그 덕분에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여름으로 가는 열차도 봄의 마지막 정차역에서 한숨 돌리고 있다. 나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계단에 앉아있는 기분으로 ‘2024’ 타이틀이 달린 올해의 플레이리스트를 랜덤으로 플레이시켰다.
그래 바로 나예요 그대가 무책임하게 버리고 간 사람
왜 그리 놀라나요 한 번쯤은 마주칠 수도 있죠그 어색한 표정 하지 마 옆에 그녀가 웃고 있잖아
그대 팔을 꼭 붙잡고 있는 그녀만을 생각해아무 일 없듯이 스쳐 가 줘요
한 번만 더 무정하면 되는데 괜히 인사 말아요
내게 미안한 듯 그 눈빛도 싫어
스치듯 안녕해요조금씩 다가오는 그대 옆의 그녀를 바라보아요
편안한 듯 그댈 믿는 듯해요 내가 그러했듯이아무 일 없듯이 스쳐 가 줘요
한 번만 더 무정하면 되는데 괜히 인사 말아요
내게 미안한 듯 그 눈빛도 싫어
스치듯 안녕해줘그녀에겐 내게 한 것처럼 돌아서지 말아요
그게 얼마만큼 힘든 일인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대라는 사람 잊는 건 나도 아직 못 끝냈는데아무 일 없듯이 스쳐 가 줘요
한 번만 더 무정하면 되는데 괜히 인사 말아요
내게 미안한 듯 그 눈빛도 싫어
스치듯 안녕해줘그 눈빛도 싫어
스치듯 안녕해줘
첫곡으로 윤종신의 ‘스치듯 안녕’ 라이브가 흘러나왔다. 가사를 제대로 듣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의 목소리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너무 슬펐다. 프로젝트가 끝나서 행복해야 했는데 말이다.
내게 미안한 듯 그 눈빛도 싫어
이수영이 2001년 발표한 ‘스치듯 안녕’은 윤종신이 작사, 박용찬이 작곡한 곡이다. 박용찬은 윤종신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성시경의 ‘희재’, Leeds의 ‘그댄 행복에 살 텐데’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Leeds의 ‘그댄 행복에 살 텐데’가 담겨있던 앨범 Obsession의 앨범 재킷은 대체 누가 디자인 한 건지 궁금함. 가끔 꿈에서 나옴) 그의 전매특허 세상에서 가장 슬픈 멜로디와 윤종신의 가슴 아픈 생활 가사는 찰떡궁합으로 음악이 흐르는 주변의 분위기를 땅끝으로 끌어내린다. 그렇게 그 곡에 중독되어 반복재생으로 계속 빗소리와 함께 그 곡을 돌려 들었다.
그렇게 듣다 보니 가사를 신경 써서 듣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뭔가 조금 이상했다. 감정이 잔뜩 이입되어있는 윤종신의 진심이 와닿아서 더 혼란스러웠다. 남자에게 너무 애절한 그였다. 그래서 다시 이수영이 부른 곡으로 변경해서 플레이할 수밖에 없었던 나.
어쨌든 봄을 마무리하는 비와 이 곡으로 나는 올해 그렇게 기다리던 봄을 하루 동안 오롯이 누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