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겪어본 적 없는 수난시대를 겪고 있는 중이다.
최근 두 달 사이에 알레르기성 결막염, 잇몸염증, 발목 인대 파열, 두통, 근막 통증에 시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작년 이맘때쯤 교통사고를 당한 것과 올해 초에 난청까지 더하면 거의 종합병원이라고 할 수 있다. 건강체는 아니지만 잔병치레 같은 것 없이 살아와서 그런지 얼마 동안은 이런 전쟁포로 같은 컨디션이 적응이 안 됐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이대로 쭉 살아가야 한다 해도 견딜만 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
그렇게 한 두 달 지내면서 느낀 게 몸이 안 좋으면 사는 게 힘들다는 것.(너무 당연한가?) 마음이 안 좋은 게 아니라 실제로 몸이 힘들다. 뻑뻑해진 눈으로 모니터를 보는 건 멀쩡한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피곤하고, 아픈 다리를 끌고 다니는 건 멀쩡한 다리로 걷는 것보다 한참 더 신경 쓰인다. 가뜩이나 사람 많은 거 싫어하는데, 몸이 이래서 더 더 사람들을 피하게 된다. 약속도 잡지 않는다.(이건 원래도 그렇긴 함) 덕분에 집에 도착할 때 즈음이면 지쳐버려서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다. 대충 씻고 열 시 이전에 잠들어버리는 신기한 경험을 한 달째하고 있는데, 잠을 많이 자야 치매에 안 걸린다니 이 상황이 앞을 보면 럭키비키인가 생각 중.
어쨌든 결막염은 회사 근처 안과의 건방진 의사의 처방대로 하루에 네 번씩 꾸준히 약을 넣고 있고, 잇몸염증은 친구에게 이를 씌우지 않아도 되는 신경치료를 받아 조금 나아진 상태다.(이를 덮지 않아도 되는 신경치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지만, 그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으로 다른 의사 친구에게 물어봐도 신박하다는 말만 할 뿐임) 두통은 치통과 함께 왔던 것이라 함께 사그라들었다. 근막 통증은 – 돈 떨어지면 손 벌리는 자식처럼 – 잊을만하면 또 올 테지만, 지금은 역시 사라진 상태다. 인대 파열은 지금도 꽤 불편하지만, 발등에 찬 물이 걸을 때마다 찰랑찰랑 소리가 나던 상황은 지났다. 물론 아직은 우주복을 입은 우주인처럼 갑갑하지만, 점점 나아지겠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반납일이 지나 연체가 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네 권 중 한 권은 다 읽었고, 두 권은 읽다가 말았으며, 한 권은 펼쳐보지도 못했다. 참으로 불성실한 사용자다. 하지만 더 읽고 싶은 책도 없고, 내가 재미없다고 다른 사람도 그렇다는 법은 없으니 오늘은 반납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낮은 32도까지 올라가는 한 여름 날씨라 했지만, 반납할 책을 들고 아파트를 나서니 그늘은 제법 여름의 코트를 허리까지는 끌어내린 듯한 기분 좋은 온도의 공기로 가득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보조기에 기대어 걷는 노인처럼, 천천히 걸으며 Don McLean의 American Pie를 들었다. 피아노와 기타, 그리고 바닥을 달리는 베이스 위로 나란히 달리는 보컬은 70년대 히트송의 전매특허 패턴이다. 이곡 베이스의 다이너미즘을 그야말로 최고이니 한번 주의 깊게 들어보는 걸 권하고 싶은데, 어디로 가는 길이든 흥이 넘치게 될 거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식사를 하러 멋진 식당으로 가는 길에,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는 길에,
이곡을 들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