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만나기 위해 고속버스터미널을 가야 했다. 평소에 길을 잘 찾는 것과는 거리가 먼 편이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의 약속은 늘 나를 긴장하게 한다. 친구가 두 줄 정도의 메시지로 간단하게 만날 장소를 보내왔을 때도 역시 그랬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커피숍. 하지만, 나는 정말 희한하게도 평소와는 다르게 그 메시지만으로 약속 장소에 쉽게 도착해 버리고 말았다. 물론 흔한 일은 아니다.
커피숍에서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그는 먼저 돌아가고, 나는 근처에서 다른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 조금 읽다가 시간을 확인하니 거의 약속 시간이다. 한 십오 분쯤 전에 출발하면 되겠지. 지하철로 세 정거장이니 그 정도면 충분할 거다.
커피숍을 나서니 찬바람이 얼굴 앞으로 훅 밀려왔다. 가죽 재킷 앞 자크를 목 바로 아래까지 끌어올리고, 두 손을 양 주머니에 꽂아 넣는다. 몇십 미터만 걸어가면 지하철이니 조금만 견디면 된다.
올 때는 앞만 보느라 몰랐는데,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보니 수많은 매장들이 이상한 나라 앨리스의 노란 벽돌 길처럼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어찌나 많은지 똑바로 걸어가기조차 힘들었다. 두 걸음 걷고 왼쪽으로 비켜주고, 다시 한걸음 걷고 몸을 비틀어 오는 사람이 지나갈 자리를 만들어준다. 도대체 지하철 입구는 어디 있는 걸까? 흥정을 해대는 사람, 친구에게 이것 좀 보라는 사람, 그거 별로라는 사람, 그럼 이건 어떻냐는 사람들 안에서 머릿속은 지각과 사고의 경계조차 희미해져 버리고 말았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
문득 머리 위 표지판을 보니 지하철 일러스트와 화살표가 보인다. 저런 건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직진하는 것만으로 역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약간은 진정된 가슴으로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제대로 가고 있다는 확신은 나를 모든 불안으로부터 유리시켰다. 심지어는 걸으며 양옆의 매장을 둘러보는 여유도 생겼다. 물건을 고르는 사람에게 ‘그게 더 괜찮은데요?’라고 마음속 조언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꽤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역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조금 앞쪽에 다른 표지판이 보인다.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화살표 옆에 역까지 남은 거리가 조그맣게 적혀있었다. 앞으로 200m 만 가면 지하철역에 도착한단다. 묵묵히 조금만 더 갔으면 되는 건데 짜증을 냈다니 너무 경솔했다. 옆에 역 이름도 쓰여있었다. ‘반포역’.
반포역?
여기는 고속버스터미널 역 아니었나? 대체 왜 두 역 사이를 연결해 둔 거지? 이건 전형적인 ‘Bridge to Nowhere’아닌가? 결국 그 다리는 건설되지 않았지만 이 통로는 실재하고 있잖아. 이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면 서울에서 평양까지 터널을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는 동안 약속시간은 지나 버렸고, 나는 다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돌아가다 보니 내가 정말 오래 걸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돌아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그런데, 내가 왜 돌아가고 있는 거지? 약속 장소는 논현역이니 반포역으로 가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는 건 너무 사나이답지 못하다는 생각도 들고, 물론 그새 오기도 또 많이 왔고.. 이쯤 되니 지쳐서 약속이고 뭐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쇼핑로는 한강시민공원 산책로처럼 중간에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