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하르드 슈타이들: 종이 위에 영혼을 인쇄하는 장인

서촌의 그라운드시소에서 열린 슈타이틀 북 컬처 매직 온 페이퍼 전시를 보기 위해 오랜만에 동네를 벗어난 주말. 겨울치고는 따뜻했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다. 찬바람을 마주하고 걷다 보면 온몸이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햇빛도 없는 을씨년스러운 날씨. 지하철에서 전시장까지 걷는 짧은 시간 동안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을 꽤 많이 마주쳤는데, 그들은 괜찮은 걸까? 

갑자기 출판장인의 전시라니… 하지만 나는 출판사 등록면허를 가지고 있고, 매년 27,000원의 등록면허세를 내고 있는 사람이니 충분히 관심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음.(당당)

출간물에서 Steidl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때, 당신은 마치 정교하게 재단된 한 벌의 맞춤 슈트처럼 독창적이고 세련된 인쇄물을 마주하게 될 거다. 독일 괴팅겐에 위치한 이 작은 출판사는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예술을 실현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게르하르드 슈타이들(Gerhard Steidl)이 있다.

게르하르드 슈타이들 2024 Werner Bartsch

게르하르드 슈타이들은 1968년 “좋은 종이, 좋은 인쇄, 그리고 완벽한 디테일.”이란 철학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출판사를 설립했다. 대량생산과 디지털 출판이 시장을 지배할 때도 슈타이들은 고전적인 오프셋 인쇄 기술을 고수했는데, 잉크의 깊이, 종이의 질감, 책장을 넘기는 소리까지 모두 그의 완벽주의의 일부라고 보면 된다. 세계적인 사진작가 로버트 프랭크, 윌리엄 에글스턴, 그리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까지, 모두 슈타이들을 통해 자신들의 작품이 종이 위에 영원히 살아 숨 쉬기를 바랐다. 

패션계에 샤넬이 있다면, 출판계에는 슈타이들이 있다. 그들의 책은 수집가들 사이에서 ‘소장할 가치가 있는 오브제’로 불린다. 한 권 한 권이 정교한 설계와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에, 슈타이들의 책은 언제나 단순한 독서 이상의 경험을 선사한다. 이런 명성은 슈타이들의 독특한 제작 방식에서 기인하는데, 모든 출판 과정이 괴팅겐의 한 건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그것이다. 기획, 디자인, 교정, 인쇄, 제본에 이르기까지. 슈타이들은 오롯이 작가의 의도와 예술적 무게를 담아내기 위해 외부의 손길을 최소화한다. 이 ‘올 인 하우스'(All-In-House) 방식은 제작의 일관성을 보장하고, 그 산출물의 품질을 약속한다.

전시의 퀄리티는 상상 이상이었는데, 네 개의 층이 볼것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각각 전달하려는 테마도 확실했다. 무엇보다도 매달려 움직이는 전시에서, 실제 라이브러리에서 그들의 책(혹은 예술작품)을 하나하나 넘겨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시간만 허락했다면 4층의 라이브러리에 진열된 책을 모두 넘겨보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예술작품은 보호장비 뒤에서 혹은 아주 먼 거리에서 눈으로만 감상해야 하는 것일까? 대중문화라는 건 그런 무게를 내려놓고, 보다 감상자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방법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감상하는 것 뿐만 아니라 직접 만지고 느낄 수 있다면 어떨까? 마치 내가 그 예술작품과 하나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책이야말로 아주 훌륭한 프로토타입이다. 책 안에 담긴 콘텐츠가 예술일 수도 있고, 책 그 자체가 예술일 수도 있다. 

전시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책 그 자체가 예술작품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해졌다. 슈타이들이 사용하는 종이의 질감, 스티칭 방법론, 커버/엔드페이퍼/헤드밴드의 조합, 오프셋 프린팅까지 수백, 수천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책의 냄새와 질감 그리고 색감은 모두 다를 테니 말이다. 예술작품이란 건 제작자의 의도로 정의되는 법이다.

디지털은 편리하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종이의 감촉, 잉크의 냄새,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같은 감각적 경험은 여전히 강력하다. 디지털이 전부를 대체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물성에서 기인한다. 전자책으로 꽤 많은 독서를 했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는 치팅을 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편함을 변명으로 불완전한 소비를 한 느낌. 

AI 기술은 출판 시장에 혁신을 가져올 거다. 자동화된 교정, 인공지능 기반 디자인, 그리고 디지털 아카이빙은 출판의 속도와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그러나 이런 흐름 속에서도 슈타이들의 방식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독서 경험의 상실을 극복할 수 있는 정답을 알려준다. AI를 활용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가치와 철학은 명확해야 한다. 기술은 도구일 뿐, 본질을 대체하지 못한다. 책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의 고민과 의사결정 그리고 그것을 위해 들였던 물리적 시간은 책이 담고 있는 콘텐츠 이상의 스토리를 함께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게르하르드 슈타이들과 그의 출판사 Steidl은 디지털 시대에도 ‘물질로서의 책’의 가치를 재확인시킨다. 인공지능이 빠르게 성장하며 새로운 창작 방식을 열어가고 있지만, 슈타이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이야기를 영원히 기억하게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잊지 마라

AI 시대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단순히 효율을 쫓는 것이 아니다. 슈타이들이 보여준 장인 정신처럼, 인간의 감각과 경험을 존중하며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균형을 맞추는 것. 그들이 만든 책이 오랫동안 사랑받듯, 우리도 기술 위에 사람의 흔적을 남길 필요가 있다. 

살아있다는 건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공감을 위해 무엇을 만들어내고 이를 후대에 전달한다는 건 우주적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별것 아닌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얼마 남지 않은 이 전시를 추천하고 싶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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