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건을 사면 박스를 버리지 않고 쌓아두는 편이라 창고가 늘 상자로 가득 차 있다. 가끔 창고정리를 할 때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하긴 하지만, 창고라는 게 옷장처럼 계절마다 정리하게 되는 건 아니라 박스는 계속 불어나기만 했다. 사실 창고정리를 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박스의 증식이긴 하다.
며칠 전 공구를 찾기 위해 창고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잘 쌓은 테트리스 막대 더미처럼 절묘하게 빈틈없이 쌓여있는 박스들에 조금 감동했었다. 멋지긴 하지만 박스 뒤쪽에 파묻혀있던 공구박스를 꺼내기 위해 몸을 뒤틀다가 허리를 삐끗한 나는 그 박스들을 정리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구고 뭐고 우선 박스들을 꺼내 거실에 늘어놓고는 하나하나 해체하는데, 두 번째로 감동할 만한 작품을 접하게 된다.
그 대상은 소니 노트북 박스의 내부 종이 지지대였다. 마치 트랜스포머의 머리 부분 같이 정교하고 복잡하게 생긴 그 지지대를 펼치니, 정말 작은 구멍 하나 없는 한 장의 직사각형 평면 골판지가 되어 버리는 것 아닌가! 저 정도 설계를 하려면 대체 두뇌를 어떤 방식으로 굴려 시뮬레이션을 해야 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골판지 위에는 어떤 식으로 접어 결합해야 한다는 매뉴얼까지 인쇄되어 있었는데, 나 라면 그걸 봐도 제대로 접어내지 못할 것만 같다. 그 지지대 안에 놓일 랩탑의 내부도 이 정도로 멋지게 설계되어있지는 않았을 텐데, ‘저걸 인간이 할 수 있나?’ 싶었던 메탈웍스 스타워즈 편도 이것에 비하면 어린이용 키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설계한 사람은 분명히 공간지각력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일 것 같은데, 고등학교 때 아이큐 테스트를 했다면 선생님께서는 이 학생에게 면담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나카무라. 네 공간지각력은 인류 최고야. 너는 커서 랩탑 박스 내부 지지대 설계자가 되거라!
선생님의 날카로운 조언에 그 학생은 대학 진학마저 포기하고 결국 세계에서 랩탑 박스의 골판지 지지대를 가장 잘 설계하는 장인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랩탑 지지대를 저렇게까지 만들 필요가 있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