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

나는 매년 연말 즈음 검진을 받는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게을러서 그렇다. 건강검진은 그 해의 숙제 같고, 숙제는 제출하기 전날 하는 게 제맛이니까. 나는 늘 날씨가 싸늘해지기 시작하면 ‘이제 연말이네’하며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고, 올해는 그것이 지난주였다.


삼성역 근처의 검진센터에 도착한 것이 오전 일곱 시 사십 분.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대기 중이다. 번호표를 받고는 내 차례가 되길 기다렸다가 접수를 마친다. 시키는 대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간호사가 내 손에 검진 파일을 쥐어준다.

가리키는 곳으로 이동하고,
손목 태그를 찍고,
기다리다가,
검진을 받는다.

마치고 나오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간호사가 다시 다른 곳을 가리킨다. 잘 정비된 시스템. 아무 생각 없이 있어도 나의 건강검진은 가장 효율적인 프로세스로 진행된다. 마치 7~80년대생 부모의 자식이 학원 사이클을 돌듯…

다른 건 다 견딜 만 한데, 초음파 검진은 꽤 피곤하다. 시키는 게 많기 때문이다. ‘숨을 들이마셔라’, ‘내뱉어라’, ‘배를 볼록하게 해라’. 나는 성실한 편이라 시키는 대로 꽤 열심히 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런데, 이전 검진결과를 들여다보며 간 주변을 꽤 오래 들여다보는 간호사. 조금 무서워져서 ‘뭔가 있는 건가요?’하고 물었더니 ‘아뇨, 뭐 좀 찾느라고요’ 한다. 작년 검진결과에 있던 결절의 크기 변화를 기록해야 한다는 거다. 그렇게 한참을 뒤적(?) 거리 더니 들으라는 듯 ‘찾았다’ 하고는 화면에 마킹을 하는 그녀. 그런데, 그 주변에 뭐가 없음. 내가 보기엔 확실히 못 찾았다는 거.

내시경도 헤비 한 검진 중 하나다. 준비과정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도 있고, 70년대 고문실 같은 병실에 놓인 쪽방 침대에 엉덩이 부분이 열리는 바지를 입고 누워야 하는 경험도 평범하지 않다. 이후 간호사가 미다졸람을 주입하면 바로 정신을 잃게 되고, 이내 시간이동을 하듯 전혀 다른 곳에서 깨어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콩팥을 하나 떼어낸 건 아니겠지? 내년에는 각성제를 먹고 와봐야겠다.

이제 올해도 다 갔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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