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라는 하루키의 소설이 있다. 그의 초기 소설로, 그의 다른 초현실주의적 작품들과는 달리 노르웨이의 숲과 함께 연애소설로 분류되고 있는 작품이다. 얼마 전 도서관에 갔다가 이 책의 줄거리가 가물가물해서 다시 빌려왔고, 별 할 일이 없었던 주말에 이 작품을 천천히 다시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여러 관점에서 하루키를 좋아하는 편인데, 이 작품을 보고 다시 느끼게 되는 건 그의 초기작들이 너무 좋다는 거다. 물론 최근 작들의 노련해진 문체나 섬세한 구성과 비교한다면 분명히 부족한 부분이 있을 테지만, 그런 단점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생동감이 있다. 현실감이 있다.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날것의 움직임이 있다. ‘그래. 내가 이래서 하루키를 좋아했었지.’ 하게 되는 문장들과 이야기의 힘이 있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의 친구인 시마모토가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는 시베리아의 극한 환경에서 고립된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심리적 압박, 그에 의한 현실감각 왜곡, 신경증적 행동을 경험하게 되는 심리적 현상을 이야기한다. 이는 환경적 고립에서 유발되는 정신적 상태지만, 작가는 시마모토를 빌려 이를 인류가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 현상으로 확장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깊이 공감했다.
익숙하고 평범한 환경 하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무너져내리게 되는 건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으로 본다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 이유조차 알 수 없으며, 태어난 직후부터 절대적 목적지인 죽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 어쩌면 인생의 모든 과정은 그 슬픈 결말을 잠시 잊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국경의 남쪽은 ‘삶’, 태양의 서쪽은 ‘죽음’의 메타포이다. 동시에 주인공의 와이프인 유키코는 ‘삶’, 헤어진 여자친구인 이즈미는 ‘현실자각’, 어린 시절 친구인 시마모토는 ‘죽음’의 메타포이다. 초반을 연애소설처럼 그다지 집중하지 못하며 읽다가 시마모토를 재회하는 장면부터는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리게 되었던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연애소설에 너무 큰 의미를 결부시키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하루키가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에서부터 이 소설을 구상하고 전체 스토리를 완성시켰다고 굳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