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변경선

지구는 태양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전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낮이라면, 반대편은 밤이 된다. 이런 상황 안에서 상식적으로 시간을 정의하기 위해 사람들은 시간 구분선을 고안해 냈고, 그 구분선을 경계로 시차가 발생하게 되었다. 계산은 복잡했겠지만, 이후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고, 비슷한 시간에 활동하며, 비슷한 시간에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는 이야기.

물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던 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했기 때문에, 딱히 그 공식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사는 데 불편함은 없다. 오래전에는 먼 곳으로 이동하게 되면 해당 지역의 표준 시간으로 시계를 조정해야 했지만,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자동으로 세팅되기 때문에 그런 불편조차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클래식 손목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시곗바늘을 조정해주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것만큼은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다면 바로 날짜변경선이다. 비행기를 타던 나룻배를 타던 이 변경선을 건너게 되면 날짜의 변화가 생기게 되는데, 같은 논리라고 하더라도 시간을 한 시간 앞 뒤로 돌리는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날짜변경선은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출발하여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게 될 때 하루 시간 차이가 생기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안되었으며, 경도 180도가 되는 태평양 부근에 존재한다. 만약 칼로 베듯 세로로 자르게 되면 변경선 주변 – 예를 들면, 시베리아의 축치 반도나 미국의 알리샨 열도 – 에서는 옆집과 우리 집의 날짜가 다른 황당한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대륙을 가로지르지는 않도록 그려져 있다. 비슷한 이유로 2011년 사모아섬은 교역이 빈번한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과 시간대를 맞추기 위해 날짜변경선을 변경하기도 했는데, 이를 위해 당해의 12월 30일을 반납해야 했다. 고대인들의 인신공양人身供養에 비하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긴 하지만, 왠지 샤머니즘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사실 태어난 지역에서 대충 살다가 근방에서 생을 마감하던 고대에는 날짜변경선이 큰 혼란을 가져오지는 않았겠지만, 지구 전체가 일일생활권이 되어버린 요즘 해외 출장을 밥먹듯이 다녀야 하는 사람이라면 일정을 짜는데 머리깨나 아플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일요일 밤 열 시에 비행기를 타서 아홉 시간 고생하며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다시 일요일 오전 일곱 시라니, 분명히 직관적인 현상은 아니니 말이다.

아홉 시간을 견디면 열다섯 시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니…

비행기를 자주 타는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길고 힘들었던 뉴욕 출장을 마무리하고는 주말 아침 비행기에 올랐는데 도착하니 월요일이어서 바로 출근해야 한다면 날짜 변경이고 뭐고 그리니치 천문대를 부숴버리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도 몇 년 전 동생을 만나기 위해 살던 샌프란시스코에서 호주로 갈 일이 있었는데, 12월 23일에 출발해서 25일에 도착했다. 승객 대부분은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지만, 나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 해의 크리스마스이브는 내 인생에서 증발해버렸다는 것을. 다른 날이었다면 크게 기억에 안 남았을 수도 있지만 크리스마스이브라니, 왠지 누군가에게 손해배상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항에 나왔던 동생은 내게 

‘크리스마스이브에 비행기 안에 있었네?’

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크리스마스이브 자체가 없었으니까. 사모아섬사람들은 호주, 뉴질랜드와 주중 내내 무역을 할 수 있게 되기라도 했지만, 나는 비행시간 내내 시트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던 기억뿐이다. 그때는 꽤 억울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것도 꽤 신기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아직 정리되지 않은 현상들이 많았을 때 살았던 사람들은 심심하지는 않았겠다 싶기도 하고, 나도 그때 태어났다면 뭐 하나쯤은 건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뭐 생각하는 건 내 맘이니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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