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와 욱하는 성격

요즘 무화과를 많이 먹는다. 먹기 전/후 처리가 귀찮은 과일들은 질색이라 귤, 천도복숭아, 자두 정도 외에는 있어도 잘 먹지 않게 되는데, 무화과는 반을 갈라 숟가락으로 퍼먹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꽤 즐겨 먹는 편이다.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무화과는 열매가 아니라 꽃이다. 열매의 껍질처럼 보이는 것은 꽃받침인데, 무화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껍질째 먹기도 한다. 무화과는 꽃이 없는 과일이라는 뜻인데, 사실 과일처럼 보이는 덩어리 안쪽에 꽃이 빽빽하게 가득 차 있다. 덕분에 일반 나비나 벌은 꿀을 따먹을 수 없으며, 무화과와 공생하도록 진화된 좀벌들만이 열매 밑동으로 기어들어가 꽃들을 수정시켜준다고 한다.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가는데, 진화라는 것이 ‘아, 무화과를 수정시켜 줄 만한 벌이 없네요? 그렇다면, 제가 한번 열매 밑동의 눈곱만한 구멍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진화해 보겠습니다.’ 하면서 이 주 만에 덜컥 완료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무화과는 좀벌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수백 년 동안 대체 어떻게 수정을 해왔던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예전에는 무화과도 다른 식물들처럼 꽃이 외부로 만개했었지만 어떤 계기로 친한 몇몇 벌들과 의기투합하여, 무화과는 꽃받침으로 꽃을 감싸고 벌은 몸을 길이 1mm 이하 좀벌로 진화했을 수도 있다. 물론 둘 중 어느 하나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 많이 난처했을 것 같지만, 다행히 둘은 약속을 수백 년에 걸쳐 잘 이행했고 결국 무화과는 현재처럼 꽃까지 먹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님 말고.

아담과 이브가 수치심을 느껴 부끄러운 곳을 가리는 데 사용한 것도 무화과 잎이었다.  마태오 복음서를 보면 예수가 배가 고파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려 했는데 마침 열매가 없고 잎사귀만 보여서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여, 아무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이다

라고 저주를 퍼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존경해야 하는 분은 맞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좀 치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떠신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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