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는 약속 장소에 늘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편이었다. 할 일이 없어도 왠지 미적미적 일찍 출발하지 못하는 건 나만의 버릇. 결국 대부분 정각 혹은 약간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조금 일찍 출발할 걸’ 하며 후회한다. 하지만 버릇이라는 게 쉽게 고쳐지는 것은 아닙디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라고 할까?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싫다면 ‘미안합니다. 받아들일게요.’ 할 준비 정도는 되어 있다.
서울 어디쯤에 버릇 주머니를 묻어두고 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라고 갑자기 부지런해질리는 없다. 이곳은 생경生硬하니, 우선 구글맵이나 시티 맵퍼 등으로 먼저 위치를 확인해 두는 것만 조금 다를 뿐이다. 한번 길치는 평생 길치니까.
한 블록 걸어 내려가서 뮤니(샌프란시스코 버스)를 탄 후에 차이나타운을 지나 내리면 되네.
지도 앱을 검색하면 어디든 못 갈 곳이 없다.(실물 지도에서는 현재 내 위치도 못 찾음) 게다가 앱으로 정류장에 차가 도착하는 시간까지 다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늦게 도착하는 게 오히려 더 여려울 것 같다. 동선을 확인하고 나니 안심하게 되어 늦장을 부려야 하는데, 집이 작다 보니 딱히 할 일도 없다. 시간을 보니 지금 나가면 10분 정도 일찍 도착하겠는 걸? 그게 뭐? 일찍 나간다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한 번도 일찍 나가본 적이 없어서 확실한 건 아님)
집을 나서 어슬렁 정류장 쪽으로 걷는다. 샌프란의 정류장은 여기저기 들쑥날쑥이라 대충 보고 다니면 지나치기 일쑤다. 표지판이 있는 곳은 반도 안된다. 대부분 길바닥에 정류장 표시가 있으니 잘 살필 것. 물론 바닥에도 정류장 표시가 없는 곳이 종종 있음. 이전에 이런 정류장을 제대로 찾아낸 적이 있었다. 이전 정류장에서부터 걸어왔는데 다음 정류장이 보여서 그 가운데 즈음이겠거니 한 것인데, 왜 이전 정류장에서 타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음.
어쨌든 생각했던 시간에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버스가 오지 않는다.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축구팀을 만들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제야 버스가 숨이 턱끝까지 찬 노인네처럼 언덕을 힘들게 기어올라온다. 어느 때든 그 자리에 주저 않으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15분이나 늦게 버스를 타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정차할 때마다 버스가 다시 움직이지 못할까 봐 조마조마해진다. 휠체어를 탄 어르신은 리프트로 올려드리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엄청나게 걸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차를 오래 하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무관심한 것일 수도 있고, 관대한 것일 수도 있다.
‘알게 뭐람?’
모두 그 정도의 표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시계를 확인한 나는 마음이 조급해질 대로 조급해진다. 어르신을 안쪽으로 모시고, 자동문을 완력으로 닫은 후 언덕길에 서있는 뮤니의 뒤를 힘껏 밀어주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차이타 타운에 진입하자 타고 내리는 사람의 수가 서너 배로 증가한다. 골든게이트와 베이브리지 건설의 주역이었던 중국인들은 이제 모두 노인이 되었고, 이곳 샌프란의 차이나타운에서 따뜻한 날씨를 즐기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이 분들의 즐거움이라면 역시 뮤니를 타고 두 블록 옆 친구집에 마실 가는 것이겠지. 덕분에 뮤니는 정차할 때마다 쉴 새 없이 리프트를 들었다 내렸다 한다.
약속시간은 십 분 이상 지났고 아직도 다섯 블록을 더 가야 하는데, 버스는 길가에 불법 주차해 놓은 차들 덕분에 도무지 속도를 내지 못한다. 이 정도면 친구는 분명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달리는 것과 택시를 타는 것의 시간 차이를 시뮬레이션해보고 있는데, 갑자기 도로 앞쪽에서 모든 차량들이 일제히 클락션을 울리기 시작한다. 사람들 틈 사이로 버스 앞 창문을 보니,
일방통행 도로의 끝 쪽에서 천천히 승용차 한 대가 진입해 오고 있었다.
*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약속에는 우버나 택시를 타세요. 제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