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여름, 할리우드는 두 개의 극과 극 풍경을 마주하게 됐죠. 한쪽에서는 케이팝 걸그룹이 악마를 물리치는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 스트리밍을 휩쓸며 흥행 신화를 쓰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애니메이션을 만든 스튜디오가 텅 빈 금고를 바라보며 한숨만 쉬고 있는 것. 바로 ‘케이팝 데몬 헌터즈’를 만든 소니 픽처스 이야기입니다.
소니는 올해 여름 박스오피스에서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중 유일하게 5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린 영화가 없습니다. 대표작이란 타이틀을 간신히 달고 있는 ’28 Years Later’의 월드와이드 수익은 1억 5천만 달러로, 다른 스튜디오들의 흥행작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올해 가장 핫한 영화 중 하나인 ‘케이팝 데몬 헌터즈’의 제작 주체는 바로 이 소니라는 사실.
문제는 이 영화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고, 모든 수익과 IP 권리는 넷플릭스가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니는 이 영화를 사실상 ‘하청’ 제작했고, 넷플릭스는 그 결과물을 들고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어요. 심지어 후속작과 스핀오프까지 넷플릭스 단독 배급이니 말 다했죠. 소니에게 돌아오는 수익은 고작 2천만 달러. 이 액수는 요즘 할리우드 A급 배우들이 출연료로 받는 금액보다도 적습니다. 이쯤 되면 무슨 푸념이든 절로 나오지 않을까요?
2021년,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 극장을 마비시켜 콘텐츠 제작이 주춤거렸을 때 소니는 넷플릭스와 대규모 콘텐츠 공급 계약을 체결합니다. 이름하여 ‘Pay-One Output Deal’. 조건은 이래요.
소니는 자사의 애니메이션이나 실사 프로젝트 중 상당수를 넷플릭스에 우선 협상권을 주고 넘긴다. 넷플릭스는 그 대가로 제작비에 25% 프리미엄을 얹어 지불한다. 단, 작품당 상한선은 2천만 달러
이 계약은 당시만 해도 ‘현금이 최고’인 소니에게 매력적이었습니다. 경쟁사들이 해고의 칼바람에 휘청거릴 때, 소니는 이 계약으로 고용을 유지하며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계약서 한 장이 지금 와서는 족쇄가 된 거죠. 케데헌은 넷플릭스가 배급하고 수익도 전부 가져갑니다. 후속작 역시 넷플릭스가 결정하고요. 소니는 일부 제작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뿐, 넷플릭스가 단독 제작으로 방향을 틀어도 막을 수단이 없어요.
더 비극적인 건, 이 대박 IP의 초기 씨앗조차 소니가 아니라 넷플릭스에서 싹텄다는 점입니다. 기획을 먼저 제안한 쪽도, K-POP 그룹 TWICE를 사운드트랙에 참여시키도록 제안한 인물도 모두 넷플릭스 쪽 인사들이었으니까요. 소니는 그저 뛰어난 제작 기술과 인프라를 제공했을 뿐, IP에 대한 주도권은 애초부터 넷플릭스에게 넘어가 있었죠. 그러고 보면 소니가 그렇게 억울해할 일은 아닐 수도 있음.
물론 케데헌이 이토록 전 세계를 뒤흔들 히트작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겁니다. 극장 개봉을 했더라면 북미 시장에서는 미지근한 반응에 그쳤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넷플릭스는 알고리즘을 활용해 바이럴을 만들고, 음악 기반 팬덤을 키웠습니다. 아니 알고리즘이 바이럴을 만들어 냈고, 음악 기반 팬덤이 생겨버렸다고 하는게 맞겠네요. 케데헌의 팬들은 자신들이 이 작품을 성장시켰다는 ‘창립 멤버’ 같은 소속감을 갖고 스트리밍을 반복하며 열광하고 있습니다다. 이건 누가 뭐래도 OTT 구조가 만들어낸 히트죠.
넷플릭스는 지금 케데헌의 글로벌 ‘싱어롱 이벤트’ 극장 상영으로 또 다른 수익 창출에 나섰습니다. 수많은 극장이 상영권을 달라고 넷플릭스에 매달리고 있고, 이미 수백 개 극장이 매진을 기록했어요. 관객들은 떼창을 하며 환호할 테지만, 소니는 그 환호소리에 박수조차 치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 박수의 수익도 넷플릭스 몫이기 때문이죠.
이제 넷플릭스는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최초의 애니메이션 히트작을 통해 디즈니조차 넘보는 애니메이션 IP 시장의 패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케이팝 연습생을 키운 적도 없지만, 세계 최고의 아이돌을 데뷔시킨 넷플릭스. 팀이 깨질 위험도 없고, 재협상 걱정도 없으며, 영어도 잘하고, 심지어는 나이도 먹지 않습니다! 콘텐츠 업계에서 이보다 더 효율적인 자산은, 단언컨대 없겠죠.
반면 소니는 자신의 손으로 키워낸 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그냥 풀어주고, 옆집 잔치 소리를 들으며 계란 프라이만 부쳐먹고 있는 중일텐데요. 이게 바로, 소니의 비극이 아닐까요? 플스 5프로 가격 황당하게 책정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