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병은 이 노래로

요즘 좋은 음악들이 참 많다. 멤버들이 삼분을 나누어가지며 내내 여백 없이 몰아치는 K-POP도, 옛날과는 수준이 다른 기술과 테크닉으로 무장한 재즈도 아주 들을만하니까. 과거의 거장들과는 또 다르게 해석한 하이브리드적 클래식 연주도 나쁘지 않고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한곡 두곡 듣고 나면 더 이상 음악을 듣고 싶지 않게 되어버리는 게 문제.

요즘 음악들의 빼곡한 메시지에 지치는 걸까? 그것이 숨쉴 틈도 없이 연결되는 가사일 수도 있고, 무음 구간을 허락하지 않는 연주 테크닉일 수도 있고, 엄청난 돈을 들인 장비가 뿜어내는 광기일 수도 있지. 어쨌든 브리지에서 조차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음악을 어떻게 계속해서 이어 들을 수 있겠어? 마치 시험공부범위 챕터를 하나하나 넘겨가는 것 같다니까. ‘여기까지만 하고 싶은데…’ 하며 문득문득 탈출하고 싶어지는 그런 것.

요즘 일상도 비슷했어. 탈출하고 싶어 진다는 게 말이야. 해야 할 것들이 많고, 정신도 없고, 그런데 내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그것이 간절해 보이지 않는 게 제일 큰 원인이라는 거. 보이기 위한 필요를 만들어내고, 요청한 후, 신경 쓰지 않는다. 요청을 받은 이상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요청한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요청을 만들어낸다.

마치 화수분에서 금은보화를 꺼내듯,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물론 다들 이유가 있긴 하겠지? 그런데, 그런 건 그다지 궁금하지 않아. 그런 상황을 이해해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는 그다지 좋은 성격은 아님.

한주가 정신없이 지나가고 주말이 또 왔어. 뭔가 정리된 후의 여백이 아니라, 정신없이 쏟아지는 장면에서의 일시정지. 월요일이 오전 아홉 시가 되면 다시 재생재개 버튼이 눌려지고, 내 머리와 등짝에는 계속 그것들이 이어 쏟아지겠지. 이게 바로 월요병이구나. 내가 평생 몰랐던 그것. 지금까지 몰랐다니 재수가 좋았어 난.


평소처럼 일어나서 아침을 먹자마자 스타벅스에 왔다. 내 루틴이거든. 집 근처에 생긴 이스트폴의 스타벅스는 조도가 낮아. 아침에 오면 사람도 별로 없어서 밤 열 한 시쯤 된 것 같다니까? 난 어두운 걸 좋아해서 그런지 이곳이 맘에 들어. 조용하고 가끔은 약간 서글프기도 한 그런 느낌.

오늘은 라테의 우유를 오트로 변경하고 바닐라 시럽을 두 펌프 추가했어. 주문을 걸어두고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뭘 할까 생각했다. 꽤 오랫동안…

내 가방 안에는 조지 맥개빈의 ‘숨겨진 세계’라는 책이 있어. 지난주 대출금지가 풀린 도서관에서 빌려온 거야.(직전 반납이 늦어서 대출 중지중이었음) 이것을 읽을까? 요즘 내 관심사는 지구 위의 생물이거든. 학생 때는 생물이 싫었다. 무조건 외워야만 하는 과목이었으니까. ‘미토콘드리아는 개나 줘버리라고..’ 라고 맨날 이야기했었지. 물론 개가 그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좋아한다 해도 내가 줄 수도 없음.

아니면 글을 쓰거나(결국 그걸 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 게임기를 꺼내 ‘프런트미션 5’의 세 번째 미션에 진입할 수도 있어. 물론 펜과 노트가 있으니 그림을 그릴 수도 있지.

하지만 난 유튜브를 켰어. 뇌를 사용하고 싶지 않으니까. 이번 주말은 무뇌인이 되자. 그렇게 이런저런 오래된 검색어를 따라가다가 이상은의 제주도 공연 영상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아직도 노래하고 있었어. ‘왜 이상은은 사라졌나’라는 쇼츠를 본 적도 있었는데 말이야. 이건 비밀인데 사라진 연예인들 대부분은 어딘가에서 활동하고 있거든. 그러니 앞에서 함부로 왜 요즘 활동하지 않냐고 물어보면 안 돼. 어쨌든 난 무척 반가웠어. 그녀는 씩씩하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벽’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내가 몰랐던 곡. 요즘 곡들하고는 딴판인 조용한 노래.

그런데 너무 좋았다. 그 영상 속의 이상은은 꽤 나이가 들긴 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어. 그녀는 밀짚모자 위로 비가 그친 밤하늘을 보며 기분 좋게 그 노래를 불러줬으니까. 그 노래와 함께 그녀는 그 공연장 안의 사람들을, 그 클립을 보는 사람들을 순간 20년 전으로 이끌었어. 아직 성숙하지 않았던 그때로, 여자친구와 헤어졌던 그때로, 앞길이 막막했지만 날것처럼 세상에 반응하던 그때로 말이야. 애처롭고, 불완전하고, 위로하고 싶고, 그러면서도 사랑스러운 그때의 나. 그리고 그 주변에 배경음악처럼 흘렀을 그녀의 음악.

작은 구멍으로 세상을 보지만
보이는 건 사람들의 큰 벽뿐
오늘도 습관처럼 새는 떠났고
흔한 해 질 녘 너를 만나
작은 풀꽃하나 벽속에 넣어주고
작은 연못도 내 마음에 만들었지

영상이 끝나고 나는 다시 그 음원을 찾아서 계속 돌려 들었어. 베이스 트랙도 정직하고, 림샷(스틱으로 탐 가장자리를 치는 것)도 귀엽고, 보컬도 순수한 이 노래를 어떻게 멈출 수 있겠어? 나는 월요일에도 이 음악을 들으며 출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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