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쯤인가 겨울이 가자마자 여름이 왔던 기억이 있다. 정말 그랬던 건지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봄을 빼앗겼던 그 강렬한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최근 계속 ‘오늘부터 여름’이라는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섰다. 여름을 좋아하는 건 아니어서 그게 설레는 기분 같은 건 아니다. 오히려 일요일 밤, 월요일로 등 떠밀리는 기분이랄까?
‘한걸음 뒤에 바로 있을 거야’
‘집을 나서면 갑자기 후덥지근한 공기가 밀려오겠지’
나는 지금 –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책 표지처럼 – 여름으로 나가는 문 바로 앞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을 터였다. 내게 여름은 에피톤 프로젝트의 ‘첫사랑’은 확실히 아니다. 굳이 음악에 비유하자면 메탈만 듣는 내 친구의 플레이리스트 속 Disturbed의 ‘Stupify’라는 곡 분위기에 가깝다. 시끄럽고, 정신없고. 덥고, 땀나고, 마약.. 이건 아닌가? 어쨌든… 싫다.
그런데, 날마다 여름을 시뮬레이션 하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선선한 날들이 꽤 오래 이어지고 있다. ‘뜨거워지겠지’하며 긴장한 지 꽤 오래됐는데 아직도 아우터나 니트를 입는 게 어색하지 않다니… ‘내일쯤 햇빛이 작렬하겠구나’ 생각하면, 어김없이 다음날 아침은 쌀쌀해졌다. 심지어 최근 몇 주 동안은 주말마다 비가 내려 온도가 급감하기도 했다. 내가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작년 이맘때 블로그 글을 뒤졌다. 날씨와는 상관없는 제목의 글들이지만 본문에는 날씨 이야기가 있다. 황당한 건 매번 예상과는 어긋난 버린 날씨에 놀라고 있다는 거다. 사계절을 이만큼 겪었는데도 아직 날씨에 대한 감이 없다니, 한심. 지난 주말, ‘블로그를 십 년 넘게 꾸준히 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반응이 없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일주일마다 한 번씩은 꼬박꼬박 쓰던 글도 쓰기 싫어졌다. 매번 나 혼자만 보는데 뭐 하러 쓰나 싶었다. 갑자기 뭔 소리인가 싶겠지만, 오늘 과거 글을 뒤져보며 그 이유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블로그에 날씨 이야기 밖에 없음. 날씨가 궁금한 사람들은 기상청을 가겠지.(나도 기상청 알림은 꽤 좋아함) 어쨌든 과거의 5월 초 포스트는 그때 즈음 갑자기 여름이 왔다고 했다.
그렇단 이야기는 삼사 주 전부터 여름이 올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건, 내가 시기를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 그럴 줄 알았다. 어쨌든 비가 내리는 선선한 오늘은 좀 이상한 게 맞긴 하다. 어쩌면 작년이 이상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재작년 글까지 뒤지고 싶지는 않음. 날씨 이야기 밖에 없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