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일이 있어서 분당의 서현역 근처를 가게 되었다.
시간을 꼭 지켜야 하는 약속이라 긴장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고, 덕분에 약속 시각보다 꽤 일찍 도착하고 말았다. 역에서 나오니 근처에 건물들이 꽤 많은데, 대부분 오래된 건물이다. 너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약속 시각까지 어디서 시간을 보낼까 하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알라딘 중고서점’이 눈에 들어온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지 주변에서 서점을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다니다 보면 가끔 하나씩 보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학교 근처에서 문제집이나 과제 관련 서적을 파는 서점이고 그것도 지속해서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하지만, 대형서점이라고 모두 호황을 누리는 것도 아니다.
코엑스에 있던 ‘반디 앤 루니스’가 공사 이후 오크우드 호텔 맞은편의 음침한 건물 지하로 이사를 했었는데, 그쪽에 갈 일이 생길 때마다 종종 들렀었다. 삼성역 주변에서도 가장 사람이 없는 거리에다가 지하였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가려 해도 제대로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덕분에 손님이 거의 없어 늘 한가했는데, 나는 그게 참 좋았다. 서점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대신 들어가면 한가했던 종업원들이 화톳불 주변의 불나방처럼 내 주위로 몰려들어 뭘 원하는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하도 물어봐 대는 바람에 난처했던 기억이 있다. 가뜩이나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인데, 면식 없는 사람들이 떼로 관심을 두니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다가 최근 근처를 지나가는데, 그 자리에 서점이 없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은 걸까? 이대로라면 정말 오프라인에서 서점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꽤 영업이 잘되는 서점이 있으니 바로 ‘알라딘 중고서점’이다. 이 서점은 온라인에서 먼저 영업을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인기가 꽤 좋았다. 그러다가, ‘이렇게 잘 되면, 오프라인에서도 한번 해볼까?’ – 물론 더 복잡한 타당성 검토 작업이 있었겠지만 – 하면서 여기저기에 매장을 내기 시작했는데, 현재 서울에만 열두 개, 전국에 스물일곱 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제프 베조스가 이 사례를 벤치마킹하고는 ‘우리도 오프라인에 매장을 만들어 보자고!’ 하며 시애틀에 아마존 북스 1호 매장을 냈다고 한다.(이건 거짓말)
남의 손때가 묻어있는 책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기 때문에, 중고 책이라도 마음에 들면 고민하지 않고 바로 집어 든다. 덕분에 가는 길에 알라딘 중고서점 간판이 보이면 대부분 들어가서 훑어보는 편이다.
서점은 보통 앞쪽에 인기도서를, 뒤쪽에 전문서적 및 그 외 도서를 배치하는데, 중고서점도 그 진열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일반서점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코너가 하나 있는데, 바로 ‘고객이 방금 팔고 간 책’이라는 부문이다. 방금 팔고 간 책들이기 때문에 매장 내 검색용 데스크탑으로도 검색되지 않는데, 덕분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고대 유적지를 탐색하는 느낌으로 책 사이를 뒤질 수 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책들이긴 하지만, 사연은 해변의 모래알만큼 많을 테니 살펴볼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서점에 가면 이미 가지고 있거나 읽은 책이라도 또 사고 싶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당히 많이 재발간 되었던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도 그중 하나로, 종류별로 표지가 예쁘거나 판형이 맘에 들어서 모두 가지고 있다. 그 중 ‘열린 책들’에서 발간된 ‘앵무새 죽이기’를 가장 좋아하는데, 표지의 일러스트 폰트도 귀엽고 사이즈도 적당히 아담한 데다가 두께도 뿌듯할 만큼만 딱 두꺼워서 맘에 든다.
‘지식채널 E 시리즈’처럼 서적 전 권이 가지런히 상자에 예쁘게 담겨있는 것을 보면 구매하고 싶어 지고, 책은 아니지만 반지의 제왕이나 미션 임파서블처럼 지금까지 상영된 시리즈를 모두 모아 박스셋으로 새로 찍어낸 블루레이 세트도 – 이미 시리즈 중 몇 개는 가지고 있다 해도 – 다시 사고 싶어진다. 그리고, 책이 훨씬 더 괜찮았다고 생각되는 ‘나를 찾아줘’ 영화 블루레이는 표지가 맘에 들어서인지 발견할 때마다 집어 들었다가 다시 놓곤 한다.
점점 감각적인 디지털 콘텐츠들이 늘어갈 테고, 인터넷 강국인 우리는 그것을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디지털로 접할 수 있을거다. 하지만,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 거실을 책장 넘기는 소리로 채우는 여유는 모두가 오랫동안 잊지 않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