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건물의 탕비실에는 커피 아웃렛이 두 개 달린 커다란 네스프레소 머신이 있는데, 들어가면 아우터를 벗어 대충 의자에 걸고는 늘 제일 먼저 그 머신 앞으로 걸어가는 게 어떤 의식처럼 되어 버렸다. 머신 옆 캡슐 트레이에서 색에 대한 취향만으로 – 맛의 기호가 없으니까 – 캡슐을 골라 슬라이딩 인렛에 밀어 넣으면 이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커피 향이 주변에 가득 퍼진다. 이게 좀 묘한 느낌인데, 비유해보자면 브레이커로 시멘트 바닥을 부수는 공사장 옆에서 초봄 은은한 라일락 향기를 맡는 느낌이랄까? 내려지던 커피가 ‘이건 좀 아쉬운데?’ 하는 느낌이 들 정도의 높이에서 방울지기 시작하면, 머신의 굉음도 점점 줄기 시작한다. 내가 늘 감탄하는 부분은 바로 이다음인데, 커피의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머신의 바이브레이션 모터 소리도 함께 멈춰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세상이 지금 막 끝난 것처럼. 마지막 방울 이후에 소리가 멈추는 것일 수도 있고, 소리가 멈추자 더 이상 방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히 둘 중 하나겠지만, 너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어떤 경우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소리는 사라지고, 향기는 남아있다.
마치 육신은 죽고, 기억은 남아있는 것처럼.
집에도 오래된 작은 네스프레소 머신이 있는데, 크기는 작지만 커피를 추출할 때 나는 소리는 일하는 건물의 머신에 절대 지지 않는다. 십 년이 넘도록 사용했으니 고장이 날만도 한데, 아직까지는 심통 부리는 고집쟁이 노친네 바리스타처럼 깐깐하게 커피를 잘 내려준다.
집에 있는 머신은 아주 가끔 사용하기 때문에 전원을 늘 뽑아둔다. 그래서, 커피를 내리려면 전원을 넣고 예열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동안 버튼이 깜빡깜빡 점멸을 하는 걸 멍하니 바라보는 걸 또 꽤 좋아한다. 그때가 아마 성격 급한 내가 하루 중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는 가장 긴 시간이 아닐까 싶은데, 그 시간이 지나면 바로 다시 경천동지 驚天動地의 시간이 이어진다. 그리고는 다시 침묵.
요즘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바람에 이것저것 이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말라가는 유칼립투스, 떨어진 캡슐 혹은 계란, 일어난 벽지, 제대로 닫히지 않는 창 같은 것들. 이전에 정리하다가 끝내지 못한 네트워크 작업도 신경 쓰이고,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데스크톱도 볼 때마다 맘에 걸린다. 늘 그런 해야 할 일들을 생각 저쪽에 밀어 두고는 어두울 때 들어와 몸만 살짝 뉘었다가 아침에 ‘미안’ 하며 빠져나갔었는데, 이제는 고개만 돌리면 숙제들이 한가득 눈에 걸린다.
그럴 때면 그런 죄책감들을 다 뒤로 하고, 천천히 오래된 커피 머신 앞으로 가 커피를 내린다. 그렇게 예열되는 동안 멍하니 머리를 비우고, 엄청난 굉음에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리셋된 상태로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데스크톱의 리셋 버튼이나 맨 인 블랙의 뉴럴라이저를 작동시킨 것처럼. 이런 건 꽤 편리하다.
커피 향 앞에서는 늘 기분 좋아지지만, 정작 커피를 입에 물면 고약한 쓴 맛뿐이라니. 맛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번 이야기해보자면, 그 옛날의 사약도 커피와 색깔도 비슷하고 맛도 – 물론 먹어본 적은 없지만 – 꽤 비슷했을 것만 같다. 사극을 보면 사약을 앞에 둔 죄인들은 대부분 이생에서 못 맡을 냄새를 맡은 듯한 일그러진 표정이었던 것 같은데, 만약 커피 향의 사약이 있었다면 그 장면들이 꽤 달라지지 않았을까?
‘음…으흠…. 좋네.’
이렇게 좋은 향과 함께 편안한 표정으로 행복했던 시간도 떠올리고, 기억하고 싶은 사람도 되새기고 말이다. 그러다가 커피를 한 모금 물었을 때처럼 살짝 찡그린 후 죄 값을 치르는 것이다. 왠지 조금 더 우아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죄인에게 우아하게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집의 커피머신과는 조금 멀어지더라도,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멍하니 앉아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어서 다시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