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과 위안

오래전 파리에 갔을 때였다. 

루브르 박물관의 수많은 사람에 지쳐서 무작정 바깥으로 나와 어스름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꺄후셀 다리까지 오게 되었다. 그때는 그 다리가 꺄후셀 다리 인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그 위에서 센강 쪽을 한참 바라봤었다. 양쪽 강가에 꽤 많은 사람이 삼삼오오 몰려 앉아 강 쪽을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게 꽤 좋아 보였다. 소리를 지르면 강 건너편 사람이 돌아볼 정도로 좁은 강폭 덕에 강변의 가로등 불빛만으로 강 전체가 반짝거렸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좋아 살짝 눈을 감으니, 사람들 북적이는 소리 사이로 오색 빛들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옆으로 젤다나 스콧 피츠제럴드가 지나간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보이는 그 낡은 도시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그 주변은 그대로 고흐의 그림이었다.


서울도 예쁜 곳이 참 많지만, 나는 늘 한강이 불만이었다. 멋대가리 없이 큰 강은 아기자기한 맛이라고는 전혀 없었으니까. 어느 다리를 골라도 걸어 건너려면 족히 20분은 앞만 보고 걸어야 하며, 자전거를 타도 천천히 페달을 밟으면 10분은 너끈히 걸린다. 강 옆의 팔 차선 고속도로 덕에 도시와 강은 남과 북처럼 멀기만 했고, 건물의 예쁜 불빛은 강 바깥쪽 둔치에 흩어져 버렸다. 그런 이유로 한강 밑으로 내려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안 했던 것 같다.

‘우리는 대신 올림픽 공원이 있잖아.’

라고 해봤자, 파리에는 450개가 넘는 공원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에펠탑 앞 트로카데로 광장의 분수는 연인과 직접 올라가 앉을 수도 있다. 물론 남자끼리 앉을 수도 있겠지만 서로 장난치다가 떠밀려 추락이나 할 테니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다.(제법 높음)

하지만, 운동으로 한강을 걷게 되면서 ‘이게 생각과는 아주 다르구나.’ 하게 되었다. 도시 곳곳에 숨겨진 한강 시민공원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 건너편에는 북적북적한 도시와는 유리된 공간이 존재하고 있다. 서울 인구가 다 들어와 앉아도 강으로 밀려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넓은 한강 공원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옆 사람이 들을 걱정 안 하고 친구와 진지하게 고민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조금 걷다가 강을 바라보면서 간단하게 맥주도 한잔할 수 있다. 내키면 자전거를 타고 내 달려도 될 만큼 한강은 넓은 가슴으로 많은 사람을 여유롭게 끌어안는다.

문명이 강을 끼고 발전했다는 건 분명히 우연은 아니다. 물론 물도 마셔야 했을 테고, 씻기도 해야 하며, 농공업 용수도 꼭 필요했겠지만,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바라보며 그 옆을 걸을 수 있는 강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큰 위안을 받지 않았을까? 그리고는

그래. 열심히 살아야겠어!

하며 증기기관, 비행기, 아이폰을 만들어 냈다. 물론 그렇게 결심하고는 길가의 자전거를 훔쳤던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그렇고, 오늘 날씨도 좋으니 한번 한강으로 나가볼까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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