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수염 고래

‘이 노래 알아요?’

윤도현의 흰수염 고래라는 곡. 노래방 스피커에서는 피아노로 시작되는 그 곡의 전주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나는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다. 함께 갔던 다른 친구도 모른다는 사인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노래방에서는 대화가 어려우니까.  

‘에이, 같이 불러야 되는데…’ 

하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남자 곡을 키도 바꾸지 않은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오래된 곡을 그녀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게다가 신입사원 또래가 좋아할 만한… 아니 그전에, 알고 있을 만한 밴드도 아니다. 노래방에서 선곡을 할 정도라면 꽤 좋아하는 곡일 텐데 말이다. 물론 남들을 위한 선곡을 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나머지 모두는 이 곡을 모르니 말이다. 어쨌든 그녀는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완창을 해냈고, 우리는 박수를 보냈다. 


그 후로 나는 이 곡을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해 놓고 가끔 들었다. 그렇게 몇 번 듣다가 이 곡만을 선택해서 듣기 시작했고, 지금은 스트리밍 레코드를 기록하고 있는 곡 중 하나가 되었다. 아마 연말에 멜론은 윤도현 밴드를 다시 가까워진 음악가로 제시할지도 모르겠다. 마치 재작년의 싹쓰리처럼. 

작은 연못에서 시작된 길
바다로 바다로 갈 수 있음 좋겠네
어쩌면 그 험한 길에 지칠지 몰라
걸어도 걸어도 더딘 발걸음에

너 가는 길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
말을 해줘 숨기지 마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도 언젠가 흰수염고래처럼 헤엄쳐
두려움 없이 이 넓은 세상 살아갈 수 있길
그런 사람이길

더 상처받지 마 이젠 울지 마 웃어봐

너 가는 길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
말을 해줘 숨기지 마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도 언젠가 흰수염고래처럼 헤엄쳐
두려움 없이 이 넓은 세상 살아갈 수 있길
그런 사람이길

너 가는 길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
말을 해줘 숨기지 마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도 언젠가 흰수염고래처럼 헤엄쳐
두려움 없이 이 넓은 세상 살아갈 수 있길
그런 사람이길

그런 사람이길

이런 오글거리는 가사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을까? 인트로, 세션, 보컬의 순으로 음악을 듣다가 마지막에 가사를 파 들어가는 변태적인 나의 음악감상 순서에 따라, 스트리밍 횟수가 100번을 넘어갈 때즈음 들여다봤던 이 곡의 가사는 이랬다. 권모술수가 없고 정직했다. 꼬인 데가 없고 솔직했다. 어두운데 하나 없고 투명했다. 너무 정직해서 가슴이 짠했다. 촌스럽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이 곡의 가사를 좋아하게 되었다.  

흰수염 고래는 몸길이 30m에 무게 약 150톤인 지구상에 살고 있는 가장 큰 포유류다. 하지만, 이 거대종은 절대 다른 동물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작은 크릴새우나 플랑크톤만 먹으면서 살아간다. 그런 이유로 현재는 – 컬럼비아 분지 피그미 토끼처럼 – 멸종위기 동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흰수염 고래는 생존을 위해 다른 동물을 해치거나 먹지는 않을 거다. 살아온 방식은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단지 존엄하게, 위엄 있게, 젠틀하게 멸종의 길을 걸어간다. 나는 그것도 꽤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고민에 대한 답으로 이 곡을 좋아하게 되었다면 꽤 감동적일 것 같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어떤 노래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된 이유처럼 – 밤하늘의 별만큼 많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이 앨범은 사실 윤도현이 록커 아닌 트로트 신예로 불러달라는 카피로 발매된 미니 앨범으로, YB가 마음속의 넘버원 락밴드인 사람들은 ‘사랑은 교통사고’라는 곡은 걸러주길 바란다. 나름 연주가 신나서 들을만하긴 하지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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