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의 사건: 갈비뼈 실금
재작년에는 교통사고, 작년에는 발목인대 파열, 올해는 그냥 넘어가나 싶었는데 지난달에 건널목을 건너다가 사고를 당해 갈비뼈에 실금이 가고 말았다. 골절 보험금도 받음. 보험이 있다면 갈비뼈 실금 강추. 그러다가 칵 부러지게 되면 나는 모름.
올해의 노래: 사브리나 카펜터의 ‘Manchild’
듣고 있으면 살짝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곡, Manchild. SNL 라이브를 보고 있으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음. 다른 곡들도 다 좋으니 그녀의 트랙만으로 플레이리스트를 꾸며보시길.
올해의 재발견: 김광진
얼마 전 사기당했던 성시경에게 용기를 주려고 그의 채널에 출연한 김광진. 그는 그 클립에서 ‘동경소녀’ 때 사기당했던 에피소드를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있었다. ‘천성이 선한 사람인가 봐’하고 있는데 성시경과 ‘편지’를 나누어 부르기 시작.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 매력 있어서 놀랐음. 맑고 고음 깨끗하고 기교가 자제된 요즘 트렌드의 보컬이잖아?
올해의 재발견 2: 내 주량
생각보다 잘 마시고, 다음 날 숙취도 없다. 분명히 옛날에는 엄청 못 마시고, 많이 마시면 다음 날은 하루 종일 해롱해롱 거렸음. 나도 이 진화(?)가 어색. 뭔가 힘든 것을 느끼는 장기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아니길 빈다.
올해의 한국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더 재미있었던 드라마가 없었냐면 그건 아니다. ‘자백의 대가’도 웰메이드라 생각했고, ‘폭싹 속았어요’도 볼만했다. ‘중증외상센터’도 변심 없이 끝까지 훅 봤고, ‘은 중과 상현’도 가슴 무겁게 잘 봤다. 김 부장이 그 작품들보다 더 뛰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보고 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나만의 작은 결심을 할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내겐 올해 최고의 드라마. 덧붙이자면 정재형의 음악도 참 좋았음.
올해의 외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국 드라마로, 올해 프라임타임 에미상 수상 드라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매 에피소드를 원테이크로 찍어낸 광기. 원테이크로 찍은 영상을 보면 ‘신기하네’ 정도의 감상이겠지만, 실제 찍는 입장에서는 엄청난 계산이 선행된 준비가 필요하고 그대로 이행하기 위한 현장의 압박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등장 캐릭터들의 연기와 집중력 모두 엄청났고, 전체적 구성 및 촬영도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게다가 스토리나 담고 있는 메시지까지 진지한, 그야말로 ‘똑같이라도 다시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명작.
올해의 영화: 체인소맨
톰크루즈, 브래드피트, 박정민 등 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들긴 하지만, 음악, 스토리, 영상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최고의 영화를 만나버린 걸 어쩌나? 개인적으로 체인소맨 코믹의 팬이었던 것도 한몫하겠지만, 뭐 내 랭킹인데 누가 뭐라 하진 않겠지. 여담으로 주토피아 2는 보는 도중에 뛰쳐나오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는데, 왜 사람들이 역대급 명작이라고 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감.
올해의 칫솔: 에비수 극 프리미엄케어 62번
잇몸 상태가 안 좋은 내가 기적적으로 더 나빠지지 않고 그것을 지켜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이 칫솔 덕분이다. ‘극’을 뺀 프리미엄 케어도 62번이 있으니 헛갈리면 안 됨. 음악계에는 박효신, 피겨계에는 김연아가 있다면, 칫솔계에는 에비수 극 프리미엄케어 62호가 있다.
올해의 양말: 일본 패밀리마트의 삼선 양말
기무라타쿠야가 신었다고 해서 유명해진, 패밀리마트 삼선이 트레이드마크인 흰 양말이다. 주말 자전거 탈 때 신는데, 약간 두껍고 착용감이 좋으며 늘어짐도 없음. 더 사 올걸.
올해의 이어폰: IE900
산지 꽤 됐는데 처음에는 저음의 양이 적고, 해상도가 너무 뛰어나 쏘는 느낌이 있어 거의 사용을 안 했었다. 그런데 팁을 바꾸고 나니 전반적으로 밸런스가 잡혀 생각보다 많이 썼음. 무선보다는 확실히 불편하지만 한 8개월 잘 사용했다. 하지만 후반에는 다시 에어팟프로로 돌아갔는데 1) 애플기기 간에 사용이 편하고, 2) 동시통역 업데이트가 재밌어서 몇 번 사용하다 보니 그냥 다시 쓰게 됨. 어쨌든 올해는 IE900을 가장 많이 썼음
올해의 사건: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사건
사건도 놀랍지만 후속 조치나 대응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음. 대기업의 운영자는 능력도 필요하고 혜안도 필요하지만, 그전에 젠틀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을 리딩하고 대중에게 미칠 영향을 컨트롤하는 자리에 저급한 장사꾼이 앉아있으면 안 된다는 거다. 쿠팡은 절대 아마존이 될 수 없음.
올해의 책: 서재 결혼 시키기
친구의 추천으로 읽은 문학평론가 앤 패디먼의 에세이다. 오랜만에 접한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일상 스토리였음.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다시 새것을 하나 구해서 책꽂이에 꽂아두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올해의 게임: 데쓰 스트랜딩
이 정도 레벨이면 예술작품으로 카운트해줘야 한다.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버파 3 옆에 나란히 놓아두는 것을 강력하게 제안하고 싶을 정도. 게임 내의 아티클들을 이 정도로 꼼꼼히 읽어보기도 처음. 코지마 감독은 누가 뭐래도 이 시대의 폴리매스 Polymath.(사실 올해에는 데쓰 스트랜딩 2가 발매되었지만, 이 글은 나만의 올해의 게임이니까 데쓰 스트랜딩 1을 올해의 게임에 엔트리)
올해의 도구: claude code
codex도 많이 사용했지만, 전반적으로는 claude code를 가장 많이 사용했다. 프로젝트가 대형이라면 기술 셋, 데이터베이스, 애플리케이션 구조, 모듈화 전략까지 신경 쓴 치밀한 가이드 리딩이 필요한데, 그것을 더한다면 꽤 복잡한 애플리케이션도 짧은 리드타임으로 구현해 낼 수 있다.
올해의 지름: 없음
뭔가 딱히 질렀다고 할만한 것이 없다. 생각을 곰곰이 해보고 쇼핑몰 구매히스토리를 뒤적여 봐도 정말 별게 없었음. 올해는 이런저런 일들로 정신이 없어서 그랬는지, 여러 고민들이 가득해서 그랬는지, 내 생활의 질을 높이거나 취미생활을 고양시켜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던 것 같다. 기억나는 지름이 없었다는 게 놀라워서 기록을 남겨봄.
올해의 고민: 내가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 계속할 수 있는 것
평생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인데, 올해는 거의 내내 계속 생각해 보게 됐다. 늘 엮어내야 하는 순간에 뒷심 부족으로, 게으름으로, 귀차니즘으로 놓아버리는 성격이지만, ‘이제는 좀 달라져야지’ 하고 결심했던 한 해. 올해 실험했던, 수집했던 모든 조각들을 내년에는 예쁘게 틀 안쪽부터 차근차근 맞춰놓아 봐야겠다.
올해의 소확행: 집 앞 스타벅스
그야말로 말 그대로 집 앞에 스타벅스가 생겼다. 대체 여기에 왜 스타벅스가 생긴 거지? 어쨌든 난 좋음. 왔다 갔다 하다가 살짝 들어와서 책을 조금 읽는다던가, 낙서를 한다던가,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내 몸 안의 배터리가가 충전되는 느낌이 든다. 주변 삼면이 모두 통창으로 바깥이 훤하게 보여서 아침이면 뜨는 해에 눈이 부시고, 저녁에는 건물 안 인데도 땅거미 속에 있다. 비라도 오면 사막의 중앙에서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느낌이랄까.
올해의 여행: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 들어설 때 시간시나구에 와있는 줄 알았음.
올해의 예능: 비서진
클립을 끝까지 못 보는 것에 달인인 내가 이상하게 끝까지 보게 되는 예능. 이서진의 성격이 나와 묘하게 비슷한 것 같아서 웃기고 짜증 남. 개인적으로는 한지민 편이 제일 재미있었음. 한지민이 제일 예쁘기도 했고…
2025년은 시작부터 쿵 하고 시작했던 역대급 한해였다.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 인생에 별다른 굴곡이 없었던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원펀에 쓰러져서는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던 나. 그래도 무릎을 딛고 손으로 바닥을 밀어 혼자 일어설 수밖에 없었고, 어쨌든 또 그게 됐다. 어떤 상황이든 지나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새로운 국면에 놓이게 된다. 어쨌든 내 시간도 흘러갔고 지금 나는 2025년의 끝자락에 서서 내 인생에 가장 복잡다단했던 한 해를 조용히 들여다보는 중이다.
내년은 올해와는 다르게 조금은 더 편안하기를, 그리고 또 다정하기를 바라본다.
앤디위어의 소설 속에서 인류는 2026년에 화성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첫 발을 내디뎠는데, 그 2026년이라니 왠지 징그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