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오 – Silverhair Express(장기하 Remix)와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얼마 전 오랜만에 혁오의 앨범이 릴리즈 되었습니다. 이름하여 ‘사랑으로 Remix’인데, 이전에 발매했던 곡들을 포함해서 앨범을 묶었더라고요. 팬이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앨범 전체 듣기를 선택했죠. 그런데,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와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장기하였습니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내레이션으로 오버랩되는 내용은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단편소설 속의 주인공 대사였습니다. 
오래전에 그녀의 단편소설과 같은 제목의 SF 단편집을 꽤 재미있게 읽었어요. 몇몇 작품은 테드 창의 작품과 비슷한 느낌이 나기도 하는데, SF라는 장르를 빌려 철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집중하는 것이나 기초가 탄탄한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써졌다는 공통점 때문이겠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디스토피아적 환경에서 연장된 수명을 살아가는 한 과학자의 삶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백 년 남짓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상대적으로 다이내믹하고, 정신없으며, 짧아 보이죠. 그렇다면, 오래 사는 것은 정말 축복일까요? 삶의 기간이 늘어나 모든 이벤트들이 억겁億劫의 시간 뒤로 숨어버리고, 단지 지루함, 적막, 망각만 남게 된다면 어떨까? 긴 시간에 갇혀 내가 왜 살아가고 있는지 조차 잊게 된다 해도 삶은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요?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랜 시간 동안 남편과 아들이 떠났던 우주 저편의 슬렌포니아 행성(오래전 인류가 이주하려 했던 다른 행성)을 잊지 않고, 그곳만을 바라봅니다. 적어도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그녀의 삶의 의미는 충분하기 때문이에요. 이미 그곳으로 이주한 남편과 아들은 오래전에 사망했지만, 더 이상 그 행성으로 이동하는 우주선은 없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목표이기 때문에 계속 그 행성으로의 이주를 꿈꿉니다.


개인적으로는 같은 단편집 안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라는 작품도 SF적 분위기와 철학적 요소가 잘 어울렸던 기억이어서 추천하고 싶어 지네요. 그건 그렇고 장기하의 내레이션을 듣고 있으면 – 내용과는 상관없이 – 좀 사기꾼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저만 그런가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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