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하기

머리숱도 많고 머리를 만지는 남다른 철학도 있기 때문에 이발을 할 때 꽤 신경이 쓰이는 편이다. 뿌리 깊이 숱을 치는 건 싫고 뒷머리를 이발기로 밀어 올리는 것도 못 참는다. 하지만, 막상 흰 천을 두르고 자리에 앉으면 성격상 신생아처럼 입이 터지질 않는다. 그렇게 말도 못 하고 앉아 있다가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며칠 동안은 바깥에 나가기도 싫어지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머리를 꽤 오래전부터 한분에게 맡기고 있는데, 인사하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슥슥 삭삭 내 취향대로 알아서 만져주기 때문에 아주 편하다. 살아오면서 익숙해져 편한 것들이 꽤 있지만, 그중 누가 뭐래도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매번 샵을 바꿀 때마다 따라다니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럴 가치는 충분히 있다.


오래전 처음 그분에게 머리를 할 때 도와주던 어시스턴트가 있었다. 키가 엄청 컸고, 눈도 컸으며, 얼굴은 늘 무표정이었다. 처음 머리를 감겨줄 때 실수로 내 등을 온통 다 적셔놓고는 미안해 어쩔 줄 몰라했던 그녀는 그때 아직 스물이 채 안 되었을 것이다. 사담을 나눌 정도로 익숙해졌던 그녀는 언젠가부터 샵에서 보이지 않았고, 나중에 그곳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중국 유학을 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오늘 머리를 하려고 앉아있는데 키가 껑충한 여자분이 다가와서는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녀였다. 이곳에서 얼마 전부터 실장으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원장님 시간 안 되실 때는 제가 봐드릴게요.’

하고 살짝 웃으며 자신의 손님에게 걸어가는 그녀. 여전히 키는 껑충하고, 표정도 없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카리스마가 넘쳐흘렀다. 못 보던 기간 동안에도 그녀는 착실하게 저 자리에 서야 겠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준비했겠지. 이 필드도 다른 직업들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감기는 것부터 하나하나 견뎌 나가야 손님 머리에 가위를 댈 수 있고, 어시스턴트를 쓸 수 있으며, 자신의 명함을 포스에 올려두고 활동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쉬운 일이 없는 것이다. 

그녀의 능숙한 가위질을 구경하고 있다 보니 머리를 감을 차례가 되어 안내에 따라 이동한 후 누워 머리를 뒤로 젖혔다. 샤워기 물소리가 들리자 이내 머리가 물을 먹어 묵직해진다. 그녀는 귀에 물이 들어갈까 봐 샤워기를 바로 들이대지 않고 손을 사용해서 내 옆머리를 적셨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 귀에 계속 물을 흘려 넣고 있다. 몇 번 더 물을 끼얹으면 고막까지 젖을 것 같았지만, 다행히 그전에 작업이 끝났다. 그녀는 이어서 뒷머리를 샤워기로 적시는데, 이번에는 목덜미로 물이 계속 흘러들어온다. 등이 질펀해 오는 상황에서 갑자기 목에 물이 들어가지 않냐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그녀. 

거의 안 들어와요.

들어오긴 들어온다고요. 

아직은 서툰 그녀지만 힘든 시간을 잘 견뎌내고 카리스마 넘치는 헤어드레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등을 적시면 그럴 확률이 높아진다니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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