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ap Rage’라는 용어가 있다.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라도 아마 단어의 조합만으로 느낌이 올 것 같은 이 신조어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물건을 감싸 지져놓은 포장을 개봉할 때 발생하는 분노를 이야기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포장의 물건을 구매하게 되면 개봉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애초에 설계의 목표 자체가 포장을 해체하는 고객의 손을 아작 내는 것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인데, 이 정도면 포장이라기보다는 봉인에 가깝다. 물건을 앞에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절대 개봉되어서는 안 된다는 제작자의 사명감이 느껴질 정도다. 급하게 개봉해야 하는 데 장비가 없다면 두루미가 준비한 음식을 앞에 둔 여우처럼 난감할 수밖에 없는데, 더 짜증 나는 건 제품이 들여다보인다는 것이다. 포이즌이라는 그룹의 ‘(You Can) Look But You Can’t Touch’라는 곡이 떠오르는데, 눈앞에 보이는 물건을 사용할 수 없다니 더욱더 열통이 터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포장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는데, 바로 개봉하지 않은 상태에서 물건의 외관이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형 마트의 진열대에 대충 던져두기만 하면, 모양을 보여달라고 귀찮게 하는 고객도 없고, 포장이 손상되어 판매에 문제가 되는 경우도 발생하지 않는다. 덕분에 대형 매장에서 제조사들에 이런 포장으로 물건을 납품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이런 포장을 간단하고 단순한 종이 포장으로 바꾸자는 운동을 하는 기업이 있으니 바로 아마존이다. 제프 베조스(아마존의 CEO)는 인터넷 협회가 주최하는 ‘2017 Annual Charity Gala’의 대담에서 ‘Wrap Rage’를 언급하며, 아마존은 고객을 위한 친환경 포장을 지지하고 있으며 생산자들과도 지속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고 했다. 이 대담에서 제프 베조스는 기업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고객이며 어떠한 혁신적 아이디어나 시도도 고객이 반응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런 시도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친환경 포장 운동이라고 했다. 그는 구매자들의 상품평 중 ‘Wrap Rage’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는 것을 근거로 이는 어떠한 혁신적 시도보다도 앞서 해결해야 할 당면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고객 편의나 환경문제 등 그들이 이야기하는 논리가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은 있지만, 아무래도 아마존은 가판대에 물건을 진열해놓고 판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형 매장들과는 입장이 조금 다를 거다. 대형 매장들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아마존도 동네 마트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제조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양쪽 포장을 모두 제공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해 당사자가 아닌 나로서는 그런가 보다 하면 되지만, 실제 제조사 사장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을까?
아마존은 고객을 위한 변화라고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막상 배송 중 눌려버린 포장 박스를 받게 되면
전구는 그냥 불만 들어오면 되는 거고, 나는 박스의 상태가 아주 중요하다고요!
하는 고객도 있지 않을까? 물론 나는 전구도 불만 들어오면 되고, 박스도 바로 버리니 크게 상관없긴 하지만… 어쨌든, 두꺼운 비닐 포장을 칼로 해체하다가 손을 베인 적이 있는 나로서는 제프 베조스를 지지하고 싶다.
사진: By Tktktk – Own work, CC BY-SA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