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두통이 익숙한 사람들도 꽤 많지만, 나는 그런 타입은 아니기 때문에 가끔 머리가 아프면 덜컥 겁이 난다. 여러 기관중에서도 뇌는 가장 복잡해 보이니 한번 잘못되면 회복이 쉽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오래전 탤런트 안재욱 씨가 미국 여행 중 뇌출혈을 일으켜 현지에서 수술을 받았다는 기사를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발병 전에 꽤 심한 두통에 시달렸었다고 한다. 병명은 ‘지주막하 출혈’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뇌동맥류 혈관이 터져 발생하는 뇌졸중의 하나로 보통 파열 후 3분의 2는 현장에서 급사한다고 한다. 뇌혈관이 좁아져서 발생하는 뇌졸중은어느 정도 이상 증상을 미리 인지할 수 있기 때문에
‘앗. 이거 나 지금 뇌졸중인가? 우선 구급차를 부르고..’
하는 식으로 조기대응이 가능하지만, 혈관이 터져 발생하는 뇌졸중은 바로 반신마비가 오거나 의식을 잃는다고 하니 혼자 있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안재욱은 바쁜 사람이니까 일단 쓰러졌어도, 사람들이 일 때문에 연락을 시도하다가 ‘이거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지? 혹시 뇌출혈 아냐?’ 하며 결국 구해내고 말았겠지만, 나 같이 평범한사람은 쓰러지면 며칠 동안 발견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바쁜 직업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뇌졸중은 아니지만 내 친구 중 하나는 길의 둔턱이나 장애물 때문에 다리를 삐끗하게 되면 가끔 무릎이 빠진다고 한다. 다리가 귀에 걸쳐진 이어폰도 아닌데 그렇게 쉽게 툭 빠질 수 있는 건가? 어쨌든 처음에는 상당히 곤란했지만, 이제는 당황하지 않고 익숙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법 대응 매뉴얼이 명확히 존재했다.
주변의 힘 좀 쓰겠다 싶은 사람에게 ‘아 괜찮아요. 그냥 무릎이 빠진 것뿐이니까. 혹시 괜찮으시면 잠깐 발목 좀 당겨주시겠어요?’ 하면 돼. 빠진 무릎을 당겨 한번에 맞춘다는 건 영화 속에서나 있는 일이야. 빠진 사람과 당기는 사람이 모두 초보라면 생각보다 맞추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당기는 사람은 ‘이 정도로 당겨도 되나’ 혹은 ‘다리가 빠져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힘을 잘 못주고, 당겨지는 쪽도 무릎이 훅 빠져버릴까 봐 당기는 쪽으로 따라 움직이게 되거든. 그럴 때는 상대방이 어긋난 뼈를 맞춰주길 바라지 말고, 그를 다리 고정용 바이스로 사용해야 하는 거야. 순간적으로 관성의 법칙을 활용해서 적절한 방향으로 – 이건 본능적으로 알게 돼 – 허벅지를 확! 움직이면 되지. ‘빠각’ 소리가 나면 상황 종료야.
역시 경험은 단순 학습만으로 쉽게 넘어설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뇌졸중은 무릎이 빠지는 것처럼 때때로 경험할만한 일은 아닌 데다가, 일단 발병하게 되면 익숙해지기 전에 세상을 하직할 수도 있다. 역시 바쁜 직업을 갖는 것만이 해답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채를 쓰거나…
사실 며칠 전에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파서 상당히 당황했었다. 그런 경험을 처음 해봐서 그런지, 겁은 덜컥 나는데 대체 뭘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 동안 책상 위에 엎어져 있다가는 병원이라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건물을 나섰다.
걸어가다 보니 편의점에서 가판에 초콜릿을 내어놓고 할인판매를 하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원플러스원 행사를 하고 있는 그 초콜릿을 사서 하나는 가방에 집어넣고, 나머지 하나는 포장을 뜯어 입에 욱여넣었다. 그러면서 계속 ‘왜 효과가 없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내가 이상했다는 걸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간디스토마 기생충에게 뇌를 장악당했었나 싶어 섬찟하다.
동네에 도착해서는 약국에 들러 두통약을 사 먹고, 집에 들어와 거실에 쓰러져 한 시간 정도 푹 잤던 것 같다. 일어났더니 밖은 이미 해가 져서 어둑어둑했고, 두통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뭔가를 사 먹으려고 벗어던졌던 외투를 다시 입고, 신발을 신고, 천천히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렇게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데, 선선한 바람이 얼굴 쪽으로 쓱 불어왔다. 그렇게 기분 좋은 바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만의 두통 매뉴얼은 여전히 준비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