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플레이에 걸려 우연히 듣게 된 곡을 한 주 내내 돌려 듣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맞다는 대답을 할 거예요 – 이강승
같이 일하는 친구 둘과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한 친구는 미술 전공이고, 다른 한 친구는 요즘 미술사에 푹 빠져 있다.
‘근처에서 루드비히 미술관 컬렉션전시를 하는데 주말에 문화생활 한번 하는 거 어때요?’
날씨에, 일에, 팍팍한 생활이 이어지는 중이라 해도 자신을 보듬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짧지 않은 인생을 무난하게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방법들 중 꽤 효과가 좋은 것이 바로 문화생활이다.
주말은 대부분 여유롭고, 전시회도 꽤 오랜만이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MBTI가 P인 친구들(물론 나도 P)과의 전시회 관람 약속이라니 기대가 되네. 토요일인지, 일요일인지, 아니 심지어는 이번 주말인지 조차 명확히 이야기를 안 해 줬지만 괜찮았다.
그러다가 맞이한 금요일. 이번 주라면 오늘 즈음 연락이 올 테고, 그러지 않는다면 이번 주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당일 아침에 연락이 올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 친구에게 메시지가 온다.
‘토요일에 봐요!’
평소 같았으면 그 정도로도 충분했을 거다. 하지만, 이번 주 토요일은 저녁에도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추가 회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몇 시에 모여?’
그러자 조금 포즈를 두고 답이 왔는데,
지금 숨이 턱 막혀서 쓰러질 뻔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게 또 나는 이해가 가서 미안했다.
‘그건 그렇고 좋은 음악감상실을 알게 됐는데, 거기도 갈까요?’
전시를 보고 성수동의 맛집을 간다고 분명히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거기에 음악감상실까지? 아니, 그 동선이 하루에 소화 가능한 걸까?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그런데, 가지 말자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었다는 이야기.
전시에서 모딜리아니의 ‘알제리의 여인’이라는 그림에 나도 모르게 끌렸다. 모딜리아니의 초상은 대부분 눈동자가 없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오롯이 받아야 하는 모델의 시선이 버겁고 두려웠을까? 하지만, 전시된 초상화 속의 여인은 눈동자가 그려져 있다. 그런 이유로 그녀가 모딜리아니에게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전시회의 출구 뒤쪽에는 굿즈를 판매하는 곳이 준비되어 있었고, 친구들은 무엇을 살지 한참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딱히 관심이 없었지만, 모두 하나씩 집어 들자 왠지 나도 사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콘포미즘 Conformism, 모델링 Modeling, 군중심리 群衆心理. 살아오면서 학자들이 일반화시켜놓은 사회학적 이론에 한번도 비껴간 적이 없는 나. 황급히 옆 진열대의 연필을 집어 들었는데, 사고 보니 목공용 연필이었다. 물론 태어나서 나무로 뭔가를 만들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음.
읽기 시작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포기한 것은 아닌 책들이 몇 권 있다. 그중 하나가 호프 자런의 ‘랩걸’인데, 오늘 시간이 나서 다시 조금 읽게 되었다.(이런 책은 어디까지 읽었는지 찾는데 시간이 꽤 걸리는데, 읽다 보면 그 한참 뒤도 이미 읽었던 부분인 경우가 종종 있다) 삼십 분쯤 읽었을까? 읽는 것을 멈추고 이북의 여러 기능을 뒤적뒤적하다가 – 진득하게 읽는 적이 X – 옛날에 저장해 둔 인상 깊은 문장들을 보게 되었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물론 읽었던 기억은 전혀 없다.
계속된 장마와 태풍을 지나 요 며칠 맑은 날이 계속되었다. 또 태풍이 온다니 부지런히 자전거를 타러 나가는데, 쏟아지는 햇살 아래로 아파트에 매미소리가 가득이었다. 평소에도 그랬겠지만 익숙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겠지. 하지만, 여름 하면 누가 뭐래도 뜨거운 햇빛과 공간을 압도하는 매미소리다. 이 소리가 없다면 여름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아직 올해 여름은 현재 진행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