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계속된 회의는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야 모두 끝났고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날마다 이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견뎌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여섯 시가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분침이 채 첫 번째 눈금을 지나기도 전에 건물을 나섰다.
나는 오늘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을 살 거야
임레 케르테스는 헝가리의 유대계 소설가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다. ‘운명’은 비인간적인 공간에 인간 존엄을 대비시킨 그의 대표작이고, 누군가 추천해 주었던 그 책의 첫 페이지를 오늘 넘길 수 있다면 불행했던 하루를 구원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잖아.
그렇게 가장 가까운 서점에 들어가 소설 섹션의 책꽂이를 뒤지기 시작했다. 가나다 순으로 책장을 꼼꼼히 훑었지만 ‘운명’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진열대에 있는 건가? 진열대 위의 책 정렬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지금은 그 패턴을 찾아내기에 적합한 때는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찾을 수 없는 운명인 건가.
멍하니 서있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책꽂이 옆 데스크에 책 검색용 컴퓨터가 있다. 대체 요즘 누가 서점에서 책을 찾기 위해 책장을 뒤진다는 거지?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임레 케르테스 운명 [엔터]
‘검색하신 항목의 결과가 0 개 있습니다.’
– 임레케르테스 [엔터]
‘검색하신 항목의 결과가 0 개 있습니다.’
– 임레 케르테스 [엔터]
‘검색하신 항목의 결과가 0 개 있습니다.’
– 임녜 케르테스 [엔터]
‘검색하신 항목의 결과가 0 개 있습니다.’
아니 한낱 서점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무시하는 거야 뭐야?
– 임레 카르테스 [엔터]
‘검색하신 항목의 결과가 0 개 있습니다.’
– 운명 [엔터]
‘검색하신 항목의 결과가 117 개 있습니다.’
…
– 임례 케르테스 [엔터]
‘검색하신 항목의 결과가 0 개 있습니다.’
…
…
– 임레 카스테라 [엔터]
‘검색하신 항목의 결과가 0 개 있습니다.’
솔직히 마지막은 없을 줄 알았다. 체념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