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서울에 비가 열대 우림 기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꽤 오래전 싱가포르에서 갑자기 내리는 장대비에 옆의 편의점에서 우산을 샀었다. 그리고 편의점을 나서는데 언제 비가 내렸었냐는 듯이 내리쬐는 햇빛에 눈이 부셨던 기억이 있다. ‘이런 나라도 있구나’했지만 이제 그게 우리 동네 기후라니… 오늘 점심을 먹으러 나갔을 때 여름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선글라스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었는데, 오후 일곱 시 즈음인 지금은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 장대비가 내리고 있다. 


예전에는 – 그것도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지만 – 여름 장마라면 정말 지겹게 비가 내렸다. 하루 종일, 혹은 며칠 동안 잠시 끊김도 없이, 성실한 머슴이 모내기를 하듯, 꾸준했다. 그렇게 장마 기간이 되면 ‘언제쯤 해를 볼 수 있을까?’ 하며 바깥을 한참 동안 내다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 하루 이틀 내에 해를 볼 수는 없다는 가정은 기본이었다. 그렇게 몇 개의 태풍이 지나가고 지겨운 장마가 끝나면 강렬한 태양빛이 서울을 바스락거릴 정도로 불태웠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들이마시는 숨에 습기가 포함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불볕더위라 불렀다. 

그때는 그런 불볕더위가 시민이 모두 힘을 합쳐 이겨내야 하는 위기처럼 느껴졌다. 뉴스에서도 마치 전쟁을 중계하듯 더위에 고통스러워하는 도시를 첫 번째 꼭지로 내보냈다. 밤에도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는 계속됐고, 사람들은 길거리로 나와 이웃들과 함께 적군을 비방했다. 

‘정말 너무 덥지 않아요? 올해는 대체 왜 이래?’

작년에도 더웠지만, 더위 수준의 비교가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다. 지금 이 상황이 나 혼자 견뎌내야 하는 외로운 투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함께 일하는 친구가 회사에서 인터넷 기사를 뒤져 지난 30년 간 서울의 여름 기온을 엑셀에 정리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 모두 할 일이 그렇게 없냐는 표정으로 그 친구를 쳐다봤지만, 그는 결과를 이야기해 주는 게 너무 신나서 그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온도 자료는 기상청 요소별자료 페이지에서 한 번에 다 볼 수 있음. 어쨌든 그의 말에 따르면 1970년에는 엄청난 불볕더위라 해도 30도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진짜인지 궁금해서 기상청 페이지에 가보니 32도도 있긴 했지만 여전히 올해 최고 기온인 35.8도보다는 낮은 편이다.  

그렇게 적군은 더 강해졌지만 이제 사람들은 밤에 길거리에 나와 더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집에서 창을 열고, 에어컨을 켜고, 혼자서 침묵의 전투를 한다. 집 주변 사람들을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게 뭐가 어떻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 


창을 열어보니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찬 바람이 밀려들어온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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