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를 나서며 보니 지난밤에 비가 왔는지 길이 모두 젖어있다. 비가 온 뒤의 길은 날씨가 맑을 때와는 조금 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발을 내딛을 때 약간은 진지한 느낌이 되어버린다. 평소와는 다르게 한층 짙어진 시야와 몸을 감싸는 한기에 정신이 번쩍 든다. 내 몸과 주변의 경계가 확실히 느껴진다. 지난주 주말 가을이 시작된 이후에도 한낮은 뜨거웠고, 밤에도 가끔은 후덥지근했다. 이 더위가 지겹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알 수 있다. 이제 여름은 주변에 없다.
이후에도 한참 비가 내렸다가 그치곤 했다. 창밖의 사람들은 우산을 쓰기도 하고 들고 걷기도 했다. 세상의 마지막 날처럼 퍼붓다가는 멈추고 이글거리는 태양빛으로 이내 바닥까지 말려버렸던 여름과는 사뭇 달랐다. 간간이 비가 그치면 길가 열쇠집 아저씨는 인도의 빗물을 차도로 쓸어냈다. 대낮이 다 되어가는데도 거리는 아침에서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 계속 옅은 빛이 감돌고 있다.
해야 할 일을 눈앞에 두고는 다른 것만 건드리는 건 내 오랜 병이다. 문을 열어둔 채 그 건너를 보지 않고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이유를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렇게 음악을 듣고, 책을 열고, 그림을 그리고 있어도 딱히 조급하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마 이렇게 꽤 오래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잘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쓸데없는 마인드 컨트롤은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하지만 내 정신 건강에는 꽤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넷플릭스에 ‘흑백요리사’라는 서바이벌 버라이어티가 업로드되었다. 아마 추석 때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제법 인기가 있나 보다. 나는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주변 친구들이 계속 그 이야기만 하는 바람에 조금 궁금해졌다. 하지만 며칠 동안 그 프로 주변의 다른 프로그램만 뒤적거리게 된다. 한번 선택하면 두세 시간은 집중해야 할 테니 왠지 신중하게 고르게 된다. 그렇게 고르기만 한다. 집중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주중에 휴일이 이틀이나 있다. 징검다리처럼 화요일, 목요일이 휴일이다. 모두를 그 자리에 묶어버리는 절묘한 배치라니… 물론 연속으로 쉰다 해도 어딜 갈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이런 휴일은 단지 일주일을 그냥 훅 사라지게 만들 뿐이다. ‘오늘이 휴일인가?’ 했는데 벌써 하루가 지나있다. 내일도 훅 가버리고 다음 징검다리를 짚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