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의 파이아키아, 고민시 편을 꽤 인상 깊게 봤었다. 당차고 생각이 깊어 보이는 그녀는 인터뷰 질문마다 똑소리 나는 진솔한 답변을 이어갔었다. 취미가 독서라는 그녀는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을 읽으며, 누군가의 아픔을 읽고 울면서 치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때였다. 김애란의 ‘비행운’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오래전에 그녀의 ‘바깥은 여름’이란 작품을 읽었다. 그 단편집 속의 소설들은 허무와 염세로 가득했다. 읽는 내내 굴레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가슴이 답답했다. ‘비행운’은 ‘바깥은 여름’ 이전의 작품이지만 그 분위기나 문장, 메시지는 – 약간은 더 날것으로 – 그대로 담겨있었다.
그녀의 소설은 리얼하다. 비현실적인 소재라도 현실에 있음 직하다 생각하게 될 정도다. 마치 주변에 있는 사람의 삶의 한 도막을 툭 끊어 챕터에 올린 것처럼 캐릭터들이 모두 살아 움직인다. 평범한 것을 상상하는 것은 특별한 것을 상상하는 것보다 치밀해야 한다. 평범한 것은 모두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그녀는 탁월하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어둑한 술집에 죽치고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지적이고 허세 어린 농담을 주고받다 봄 세상이 조금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어느 날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시시한 인간이 돼 있던 거다.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이 이상이 될 수 없을 거란 불안을 안고, 아울러 은지와 서윤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것 중 가장 빛나는 것을 이제 막 잃어버리게 될 참이라는 것을.
김애란 <비행운>내, 단편 <호텔 니약 따> 중
인생은 점점 나아지고 성장하며 확장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건 철없는 어린 시절뿐이다. 인생의 대부분은 –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더라도 – 점점 더 좁아지는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트였던 시야도 터널 벽에 가로막히고 이내 주변은 어둠으로 가득해지는 것이다.
학생 중에는 평소에 저랑 한마디도 안 하다 이따금 딸기우유나 초콜릿을 건네고 가는 여중생도, 말수 적고 속이 깊어 언제나 부모님을 걱정하는 남고생도 있었어요. 공부를 하도 한 탓에 수업 중에 코피를 쏟는 아이도, 갑자기 복도로 뛰어나가 토를 하는 아이도 있었고요.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김애란 <비행운> 내, 단편 <서른> 중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회항불능지점 Point Of No Return을 지난다. 일단 지나치면 다시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건 확실하다. 20대, 30대, 40대, 영구치의 발치, 청력 혹은 시력의 저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영구적 상실이란 건 새로운 만남으로 희석될 수 없는 절망적 경험이다.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김애란 <비행운> 내, 단편 <서른> 중
처음 그녀의 소설을 접했을 때는 마음이 무거워져 빨리 덮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비행운’을 읽고 나서는 – 고민시의 큐레이팅 이후여서 그런지 – 왠지 모를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주인공들이 마치 내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져 그들의 고민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야기들마다 이어지는 허무와 염세 속에서 현상학적, 해석학적 접근과 사고를 반복하게 되었던 경험 때문일까?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고민시의 말대로 이 소설을 통해 삶의 어두운 면과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고 인정하게 되면서, 현실에서 이상적 세상을 꿈꾸는 대신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문제와 마주할 수 있게 되는 힘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책을 읽게 된 것도 고민시 때문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