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예전에 함께 일하던 친구들과 식사를 했다. 일 년에 서너 번 만나기 때문에 캐치업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다들 말하는 것을 좋아해서 서로 말하려고 난리들이다. 말할 기회를 빼앗겼다 해도 엄청난 웃음소리로 결국 순간 오디오 지분을 나눠 가져가는 활발한 친구들. 덕분에 음식점에서 쫓겨날 뻔한 적도 꽤 있지만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를 다짐하는 그녀들. 그런데 쓰라고 만들어진 용어는 아닐 텐데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한 친구에게 발언권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화제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얼마 전에 결혼을 한 것이다. 조금 특이했던 건 그 화제 속의 주인공이 그녀의 남편이 아닌, 그녀의 옛 남자친구였다는 거다.
물론 우리는 그녀의 남편만큼이나 전 남자친구를 잘 알고 있다. 사실은 훨씬 더 많이 알 거다. 우리와 함께 지낼 때에는 전 남자친구와 한참 사귀고 있을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구 커플들은 서로 사랑하며, 싸우며, 견제하고, 염탐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라디오 극장’을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 현장 안에 있었다. 이들의 위태위태한 관계는 꽤 오래 유지되었는데, 그러는 동안 그녀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그녀에게 직접 들음), 또 주었던 것 같다(그녀에게 들은 것으로 유추).
결국 그녀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게 또 우리였다. 그와 그녀의 광기 넘친 집착이 너무 걱정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만남을 부추기는데 최선을 다 했다. 그 결과 그녀는 연민, 후회, 결심, 저주, 집착이 어우러진 인고의 과정을 거치며 전 남자친구를 끊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나면서도 특유의 집중력과 집착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황을 메신저로 생중계해주었다.
‘그 애가 농구를 좋아해요.(그녀는 농구란 것을 해본 적이 없음) 같이 농구를 하자고 할까? 소원 들어주기 농구게임을 하면 어떨까요?’
그냥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는 이야기잖아.(스스로도 ‘소원 들어주기’라고 칭하고 있음) 하지만 다행히 새로운 남자친구는 수더분한 편이어서 이내 평화로운 연애생활로 접어들게 되었고, 드디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뭔가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심심한 행보랄까?
‘그런데 전 남자친구가 전화를 대체 왜 한 건데?’
이주 전쯤 술을 잔뜩 마시고 집에 가고 있는데 그 지독한 사랑의 주인공, 전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는 그녀. 헤어진 지 삼 년이 다 되어가는데 갑자기 왜 전화를 한 걸까? 전화 너머로 그는 다음 주에 자신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그게 전 여자친구에게 삼 년 만에 전화해서 할 이야기인가? 상식을 초월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질세라 자신도 결혼한다고 이야기했고, 또 그 이야기에 너무 놀라는 전 남자친구. 놀랄 건 또 뭐야? 그건 그렇고, 전화를 한 이유가 혹시 축의금이라도 챙겨볼까 하는 한심한 목적인 걸까?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우리 헤어질 때… 네가 엄청난 저주를 걸었잖아.’
그녀는 마지막 그와 헤어질 때 그가 줬던 물건을 굳이 집 앞까지 가져다주며, 한 페이지에서는 다 볼 수 없는 두 페이지 빼곡히 적힌 저주의 메시지를 함께 보냈다고 했다.
‘정말 꽉꽉 채워 썼고, 모든 라인이 서로 각기 다른 저주였어요. 그땐 너무 힘들었으니까.’
너는 앞으로 연애가 지옥 같을 거고, 단명할 것이고, 머지않아 고자가 될 것이다. 심리상담으로 극복이 불가능한 완전한 물리적 고자인 너는 자녀를 가질 수 없다. 연애 상대는 너의 돈을 보고 다가오지만, 실제로 너는 돈이 없지. 네 여자친구는 네 친구와 사귀고, 또 결혼하게 될 거야. 너는 그 결혼에 축의금을 내겠지. 올리는 자크마다 살점이 물리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돌이 씹히며, 일 년 내에 골룸 스타일의 추한 대머리가 된다. 서류를 들 때마다 종이에 손을 베이며, 그 상처는 나을 듯 나을 듯 계속 벌어져 결국 파상풍 균의 집이 되어….
상세히 생각은 안 나지만 간결한 저주 문장들을 알차게 엮어 두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는 그녀. 쉬워 보이지만 칭찬으로 채우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고 했다.
‘칭찬으로 두 페이지를 채워본 적도 있어?’
‘…….’ (그녀)
‘…’ (우리)
어쨌든 그녀의 전 남자친구는 결혼 전에 그 저주를 풀고 싶었다는 것이 중론衆論이었다. 온갖 치사한 짓을 일삼으며 그녀를 괴롭혔던 무뢰한無賴漢이었지만, 저런 엄청난 저주를 등에 지고 결혼하는 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사람의 약한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는 무속의 힘은 유일하게 국회 근처 교통혼잡이 사라지는 시간대에 계엄을 선포하게 하기도 하니까.
‘그건 그렇고 그런 남자랑 결혼하는 여자는 대체 어떤 사람인 거야?’
디자이너고 긴 머리에 좀 순진한 타입인 것 같더라고요.
그녀의 대답에 우리는 순간적으로 오싹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