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거리와 우산

아침에만 잠깐 내린다고 했던 비였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우산을 쓰고 Pink Sweat$의 ‘At My Worst’를 들으며 집 근처의 커피숍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텅 빈 촉촉해진 거리에 딱 어울리는 음악이다. 아직 길에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비도 오고, 이른 시간이기도 하니까.

샌프란시스코에는 비가 겨울에만 온다. 겨울이 우기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거의 오지 않는다고 했다. 큰 더플백을 들고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했던 날에도 비가 내렸다. 우버를 타고 시내로 가는데 – 십 년 넘게 샌프란에 살았다는 – 운전사는 비가 오는 것을 거의 처음 본다고 했다. 하지만, 그 후 그곳에 일 년 넘게 사는 동안에도 비는 꽤 많이 왔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내 기억 속의 샌프란시스코는 안개와 함께 겨울에 비가 치덕치덕 내리는 우울한 도시였다.

나는 비가 오면 우산을 썼지만, 그곳 사람들은 대충 방수가 되는 점퍼만 뒤집어쓰고 잘도 걸어 다녔다. 그렇게 카페에 들어와서는 툭툭 털고 자리에 앉는데, 옷이나 신발이 젖는 것에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들의 눅눅해졌을 신발 속을 걱정하는 건 나뿐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그러고 다녔다. 비가 와도 – 방수가 되는 가방과 남색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는 – 꿋꿋하게 걸어 다녔다. 실내에 들어가면 생각보다 빨리 마르기도 했고, 점점 눅눅한 발에 신경이 덜 쓰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게 좋았던 건 아니지만… 하지만, 서울로 돌아와서는 자연스럽게 다시 우산을 쓰기 시작했다. 왜 다시 우산을 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와서는 다시 날씨를 미리 확인하고 우산을 챙겼다.

오늘도 눈을 가늘게 뜨지 않으면 내리는지도 모를 비였지만 나는 우산을 폈다.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 나올 때쯤은 꽤 비가 굵어졌다. 그래 봤자 가랑비지만… 길을 걷다 보니 맞은편에서 어떤 사람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머리만 안 젖으면 되지 뭐’ 하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젖은 신발을 신고 잘도 다녔던 샌프란시스코가 떠올랐다.

‘그땐 외로워서 비에 젖는 건 신경 쓸 일도 아니었지.’

그랬다. 그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 살았으니까. 주변에 몇몇 친구가 있긴 했지만, 만나려면 칼트레인(기차)을 타고 두 시간은 가야 하는 거리에 살았다. 미국에서는 그게 주변이었다. 그러고 보니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혼자였다. 적어도 내가 살았던 제팬 타운 근처는 그랬다. 주변은 스튜디오 천지였고, 길거리에도 늘 혼자 걷는 사람들뿐이었다. 심지어는 노숙자도 혼자였다. 그들은 비가 오든, 안개가 짙든, 바람이 불든,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걸으며 외로움을 벗 삼아 지냈다. 내가 그래서 그렇게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다시 우산을 꼬박꼬박 챙겨 쓰게 된 건 – 주변 사람들이 모두 쓰기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 비 맞는 게 신경 쓰일 정도로 덜 외롭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인생이라는 건 태어날 때부터 다시 돌아갈 때까지 외로움의 연속이긴 하지만, 역시 주변에 모국어로 안부를 건넬 사람도 없는 곳에서 홀로 살아야 한다는 건 호랑이도 없이 토굴 속에 갇혀 마늘만 먹고사는 것과 비슷하니까.

삼주 내내 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싫은 건 아니지만, 벚꽃을 조금 더 보고 싶기 때문에 이제는 좀 그쳐주면 좋겠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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