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알파고가 등장했죠. 해당 AI가 이세돌을 꺾은 이후 바둑계는 그야말로 폭풍 속이었을 겁니다
한 분야가 굳건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시간과 노력을 들인 전문가가 필요하고, 그들이 존경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피라미드 같은 구조로 말이죠.
바둑의 경우도 방바닥이나 식탁 위에 돌을 사용하며 장난처럼 시작해서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전문가들은 대국을 반복하며 자신의 실력을 키워나가고, 실력은 없지만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그들의 노하우를 일반화시켜 법칙을 만들어 냈어요. 프레임웍 생성의 대가들은 해당 자료들을 사용해 교육체계를 만들고, 많은 아이들은 그 안에서 바둑왕을 꿈꾸며 자라게 됩니다. 이 모든 일련의 작업들은 ‘바둑으로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자’가 되리라는 비전을 향하고 있어요. 누군가 제2의 이세돌이 되어 대적할 사람이 없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그렇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을 등에 업고 전 업계가 발전하는 거죠.
하지만, 그런 견고한 성에 AI가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그 바벨탑의 허리를 두 동강 내버렸어요. 인간의 유희에 기계가 끼어들어 난도질을 해버린 겁니다. 그 이후 AI는 더 견고해져서 이제 사람이 그것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졌습니다. 온라인 바둑게임에서는 AI를 사용하여 치팅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고, 대국에서도 대국자들의 수의 의미를 분석하는 게 아니라 AI와 동일한 곳에 돌을 두었는지로 그 퀄리티를 판단하게 되었죠. 인간의 수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게 되고, 사람들은 점점 의미가 수반되지 않는 AI의 수를 연구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오롯이 사람의 역량만으로 대전하기 힘들어져 버린 바둑에 사람들은 점점 흥미를 잃어갈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새로 개업하는 바둑학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업계 정설입니다.
사람들은 이전부터 간단한 반복 작업의 업무들이 AI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이야기해왔습니다. 물론 이미 꽤 많이 진행되기도 했죠. 하지만, 인간의 창의력과 관련된 분야는 AI가 대처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바둑을 창의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사람이 생각해내는 수는 창의적이지만, 일정 규칙 하에서 운영되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알고리즘과 대척점에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역시 창작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사실 요즘 AI는 창작에 엄청난 재미를 들이고 있는 중이거든요.
2020년 OpenAI의 GPT-3 발표 이후 NLP(자연어 처리)가 엄청난 화두였던 것 기억하시나요? 그다음 해 DALL-E라는 text-to-image AI가 소개되었고요. 그해 10월 Disco Diffusion이라는 조금 더 발전된 모델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때 즈음부터 예술가들이 해당 AI 모델을 도구로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얼마 후 프롬프트 – 이게 꽤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 입력이 훨씬 용이한 MidJourney가 소개되며 일반인들도 쉽게 직접 AI 이미지를 생성해볼 수 있게 되었죠. OpenAI에서도 올해 4월 DALL-E2를 공개하면서 AI text-to-image의 춘추전국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 그림은 제가 디스코드에서 미드 저니를 사용해 ‘흰 스커트를 입은 우울한 소녀’라는 프롬프트로 그린 – 그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 그림입니다. 이런 식으로 멋진 이미지를 만드는데 가장 특화된 예술가가 문학가라는 것이 조금 아이러닉 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어쨌든, 현 모델은 프롬프트를 기반으로 이미지를 생성하고 있으니까요. 마치 검색 엔진에서 가장 효과적인 검색어를 찾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그 프롬프트의 예술성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기 위한 매직 키워드라는 것은 동일하겠죠?
사실 명확한 논리로 설명 가능한 규칙이 존재하는 비즈니스가 알고리즘화 하기에는 용이할 겁니다. 하지만, 그 규칙이나 참조 데이터가 무수히 많고, 그것들의 불규칙적인 조합이 필요한 경우라면 그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개인이 여러 참조 데이터의 우선순위를 판단하여 선별하고 다시 적절한 규칙을 적용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복잡하고 불규칙할수록, 그 알고리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해지기 때문이에요. 딥러닝은 그런 복잡도를 엄청난 데이터에 기대어 해결하지만, 가장 큰 단점은 – 몇몇 모델을 제외하고는 – 그 의미나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 이유로 고객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비즈니스 인더스트리의 메인스트림 영역에서 딥러닝은 아직 큰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정확도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감성의 영역인 예술 분야입니다.
말씀드렸던 대로 예술 영역은 창의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AI가 침범하기 가장 어려운 영역이라 이야기해왔죠. 하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지금까지 딥러닝 모델이 진화해온 상황을 보면 AI가 지금 상황에서 가장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영역은 예술 분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객에게 논리적 설명을 할 필요도 없고, 책임을 질 필요도 없거든요. 어느 정도의 불완전성은 예술성이나 독창성이라고 밀어붙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다양한 창작 기법이 존재하고 레퍼런스도 충분해서 기존 산출물의 재구성이나 트윅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시장의 상황도 AI의 창작활동에 긍정적인 시그널을 더해주고 있죠. 물론 기계는 창의력과 독창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AI는 그 부족함을 끈기와 속도감 있는 반복으로 극복해 낼 겁니다. GPU는 점점 효율적으로 개선되고, 저렴해지고 있으니까요.
이미 MidJourney는 일반 일러스트레이터를 위협할만한 퀄리티의 작품을 수초 안에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드신다고요? 그렇다면 프롬프트를 살짝 바꾸시거나, 버튼을 눌러 재작업 시켜보세요. AI는 불평 하나 없이 수 초 안에 새로운 안을 들이밀어줄 겁니다.
인공지능은 인류에게 작동하고 있는 가장 심오한 것 중 하나이다. 불이나 전기보다 더 심오하다
선다 피차이(2020)/구글 최고경영자
그렇다고 예술 분야의 생산자가 스위치를 올리듯 ‘딸깍’ AI로 대체되지는 않겠죠. 하지만, 앞으로 이런 변화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있을 겁니다. 가늠이 안 되는 강적을 마주하고 있다고나 할까?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벅찬 시대에 이런 속도감 있는 고민을 지속적으로 안겨주는 테크놀로지는 정말 인류를 위한 만능열쇠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