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산 아이폰은 고화질 녹화 영상을 바로 외장 SSD에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고화질 영상은커녕 일반 영상도 잘 안 찍긴 하지만 테스트는 해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이크로B – usb-C 케이블을 새로 구매해야 한다. 물론 그런 케이블은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앱을 구동시켜 보니 알리는 광군제와 블랙 프라이데이 배너로 정신없이 도배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연말 쇼핑 시즌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알리 입점매장들이 광군제 이전에 가격을 미리 높여놓고 할인율이 높은 것처럼 속여 고객의 뒤통수를 치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배너를 뒤로하고 바로 구매해야 하는 케이블을 검색했다. 가격은 3불부터 10불까지 다양했다. 속도와 브랜드 등을 꼼꼼히 살펴서 가장 합리적인 5불짜리 케이블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결재를 하려고 보니 이전에 심심할 때마다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물건들도 할인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되었다.
‘맞아. 내가 이때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지.’
오래전 나의 순수한 관심사들에 미소 짓고 있는데, 담아둔 물건 중에서 커다란 전동 드라이버가 눈에 들어왔다. 가격이 조금 비싸긴 했지만 모터의 속도를 6단계나 조절할 수 있는 멋진 물건이었다. 집에 있는 것은 겨우 2단계 조정만 가능해서 많이 아쉬웠다. 어쨌든 그 제품이 무려 40% 할인에 들어가는 바람에 40불이면 구매가 가능했다. 이전에는 얼마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확실히 40불보다는 비쌌을 것이다. 교통사고도 당했는데(요즘 무언가를 사기 전에는 늘 이 생각을 함) 이 정도는 나를 위해 구매해도 될 것 같았다. 앞으로 전동 드라이버를 쓸 많은 일이 생길 것이다.
얼마 전 원목을 깎아 책상을 스스로 제작한 한 유튜버의 영상을 봤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책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데서 멈췄던 걸까? 그 유튜버처럼 직접 만들면 되는데 말이다. 그러려면 전동 드라이버는 필수다. 아니면 손목을 많이 써서 인대를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저 속도로 나사를 조이면 손을 다칠 일도 없다. 만약 약속 때문에 빨리 조립을 마쳐야 한다면 최대 속도로 조이면 된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다 팔리기 전에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한둘은 아닐 테니 말이다.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물건을 담았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광군제 배너. 20불 구매 마다 4불을 할인해 준다고? 아래쪽에는 90불에 도달하면 10불을 할인해 준다는 쿠폰 코드도 있었다. 저 두 할인은 중복이 가능하겠는 걸. 합리적 의심. 만약 그렇다면 90불 이상 구매 시 전동 드라이버를 사은품으로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알리의 관리자는 이런 비밀을 알아차리는 소비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하지만, 수학과인 나는 논리적 가설 수립과 테스트를 통해 그들의 허를 찌르고 만 것이다. 아니 찌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냉정하게 지금 필요한 물건들을 체크해야 한다. 할인만을 위해 필요도 없는 물건을 구매하는 것은 지양止揚하자. 그런 비합리적인 결정은 견딜 수 없으니까.
먼저 무선충전기를 집어넣었다. 충전기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다음으로 열전사 프린터를 담는다. 귀여운 그림을 그려서 바로 스티커 인쇄가 가능한 제품이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 응용해보자면 이름이나 제품의 용도를 인쇄해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아임 신뢰예요’라고 말하고 있는 병맛 캐릭터를 그려 인쇄한 후 친구의 핸드폰에 붙여줄 수도 있다. 아무래도 너무 유용할 것 같아서 전사용지 다섯 개 묶음까지 함께 장바구니에 담았다.
몇개 물건을 담고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 필요한 제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 전동 드라이버가 품절이 될까 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던 중에 열전사 프린터의 연관상품 리스트에서 열전사 프린터 기능이 있는 카메라를 보게 되었다. 사진을 찍으면 그것을 바로 인쇄해준다고 한다. 세상에 이렇게나 신박한 아이디어라니… 이런 건 친척 아이들 선물로 딱이다. 마침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저렴하게 멋진 선물을 마련해 두는 건 현명한 소비라고 할 수 있겠지? 나는 신속하게 카메라 두 개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나도 가지고 싶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품을 담고 보니 95불이다.
하지만 의미 없는 5불 조차 낭비하고 싶지 않다. 한 푼이라도 헛되이 쓰지 않는다는 의지는 100세 시대를 맞이한 인류에게 꼭 필요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기운을 내서 조금 더 쇼핑몰을 뒤져보니 2불 정도 저렴한 열전사 프린팅 카메라를 찾을 수 있었다.(할렐루야) 일반 카메라 모양이 아니라 캐릭터 형태였지만 오히려 아이들은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1불이 조금 아깝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알리의 관계자들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들도 광군제를 준비하느라 고생했을 테니 말이다. 해피 크리스마스.
체크아웃 단계에서 확인해 보니 가설대로 쿠폰까지 모두 적용이 가능했다. OpenAI의 개발자들이 결국 AGI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범용인공지능)를 만들어낼 때 이런 기분이 될까? 나는 결재를 완료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책상 안에 잠들어 있던 외장 SSD를 꺼냈다. 그런데 그 안쪽으로 usb-A – usb-C 젠더가 보인다. 이런 걸 언제 샀지? 무심코 젠더를 기존 외장 SSD 케이블 끝에 꽂아보았는데…
‘어, 이게 내가 사려던 케이블인데?’
새 아이폰에 꽂아보니 바로 인식 완료. 고화질 영상을 찍어 보니 저장도 바로 외장 SSD에 잘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난 오늘 대체 뭘 한 거지?
뭐 한두 번도 아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