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선에 신분증은 왜요?

나는 여행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다. 그런 이유로 여행을 간다 해도 늘 무계획이고, 대충 숙소의 근방을 걸어 다니는 게 전부다. 그렇게 내게 여행은 동네 마실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여행을 실감하는 순간은 역시 여행지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비행기를 타고 지상과 유리되었다가 다시 내려서며 일시에 울리는 출입국사무소나 통신사의 메시지 알림으로 ‘아, 여행이 시작됐구나!’ 하게 되는 것이다. 


연휴 동안 제주도에 가기로 했다. 여행도, 비행기도 꽤 오랜만이다. 출발하는 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좋았다. 일찍 일어나 여행가방 대신 백팩을 열어두고는 왔다 갔다 하며 꼭 필요한 것들만 담았다. 꽤 오래전 유럽 여행을 갈 때도 티셔츠랑 속옷 몇 개만 가져갔었는데,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따뜻한 쪽으로 가는 여행은 그렇게 짐이 적어서 좋다. 그렇게 티셔츠와 속옷을 맨 아래쪽에 넣고, 랩탑, 책, 아이패드, e-book용 디바이스, 카메라 등을 집어넣었더니 백팩이 이내 부풀어 오른다. 거기에 샤워를 한 후 칫솔, 로션, 샴푸, 면도기까지 담으려니 입구가 잘 안 닫혔다. 티셔츠를 하나 더 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차곡차곡 쌓아 모두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놓친 것이 없는지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체크를 한다. 충전기 외에는 모든 것이 다 준비 완료였다. 사실 충전기는 잊은 게 아니다. 충전이 취미인 내가 그걸 잊을 리가 없다. 적어도 집을 나서기 전에 어떻게든 집어넣었을 거다. 나는 책상 속에 잠들어 있던, 열 개의 디바이스를 한 번에 충전할 수 있는 충전기를 백팩에 집어넣는 것으로 마지막 준비를 마쳤다. 

공항에 도착해서 게이트로 들어가려는데,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한다. 물론 나는 – 충전기는 가져왔지만 – 신분증은 챙기지 않았다. 잊은 게 아니라, 안 가져왔다. 국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신분증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이전에 제주도를 갈 때에도 신분증 없이 비행기를 잘 탔던 것만 같았다.(그럴 리 없음) 서울에서 광주를 갈 때도 톨게이트에서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제주도가 그 사이에 국가로 독립했을 리는 없는데 말이다. 혹시 코로나 때문에 법이 개정된 건가? 하긴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시계를 보니 집에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냉정해야 된다. ‘방법을 찾아야 해.’하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웹하드에 여권과 주민등록증 등을 스캔해서 올려둔 게 기억났다. 재빨리 웹하드에 로그인해서 폴더 사이를 뒤졌다. 파일에 태그까지 지정해 두어서 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언제 태그까지 지정해 둘 생각을 했을까? 혹시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절대 아님) 나는 자연스럽게 스캔된 신분증 파일을 다운로드한 후 게이트의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게이트의 직원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건 안된다고 한다. 그럼 뭐가 되냐고 되물었지만, 바로 머릿속에서 ‘아차’하고 말았는데

‘진짜 신분증이요’ 

나라도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주눅이 든 나는 그에게 다른 방법은 없냐고 공손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그는 – 보물찾기 예능프로의 힌트 담당 PD처럼 – 남들에게는 안 들리도록 조용히 ‘아래 항공사 직원에게 가면 방법을 알려줄 거예요’ 한다. 아니 바로 알려주면 안 되나? 어쨌든 나는 힌트를 얻은 채로 항공사 직원에게 뛰어 내려갔다. 이대로 비행기를 못 타게 되면 평생 내가 너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것만 같았다. 카네기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게 되면, 남에게 배척당한다고 했다. 신분증 때문에 그런 계기를 만들 수는 없었다. 나는 항공사 부스로 가서는 짐을 부치는 사람들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짐을 올려달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나는 그게 아니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 순간 우리는 뭔가 통한 것 같았다. 그녀가 내게 ‘저 뒤쪽의 무인민원발급창구에서 주민등록등본을 뽑아오세요.’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내가 그 이유로 온 것을 알았냐고 묻자, 그녀는 ‘하루에 열 명도 넘어요.’라고 하며 한심한 듯이 쳐다본다. 나는 그 시선을 못 본 척하고는 등본 발급용 키오스크 앞으로 이동했다. 

등본은 무료로 인쇄가 가능했다. 우리나라는 생각보다 좋은 나라였다. 이 기계는 대체 내가 나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 인증할지 궁금했는데, 바로 지문인증을 사용하고 있었다. 여러분, 성인이 되자마자 죄수가 된 것 마냥 열 손가락 지문을 모조리 정부에 찍어 바쳤던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인증은 수월하지 않았다. 다섯 번째 실패를 하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이미 네 사람이나 줄을 서 있었다. 공항 내 무인민원발급창구에 아르바이트 채용 제출을 위한 등본을 인쇄하러 올리는 없으니, 이들은 모두 나처럼 급박한 상황일 것이다. 내가 시간을 지연시키는 바람에 줄의 마지막에 서있는 사람은 비행기를 못 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오래 달리기를 해도 땀이 안나는 내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래도 세 사람은 타는데 뭐’ 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상황 해결에 집중했다. 

지문이라는 게 성장하면서 바뀔 수도 있는 거였나? 그렇다면 범죄자들의 지문을 수집하는 게 의미가 없어진다. 이걸 공개적으로 발표해도 좋을지 의문이었다. 내 경험 하나로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해오던 가장 일반적인 법의학적 증거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이다. 모든 국가는 범죄자 데이터베이스에서 지문 삭제 작업을 수행할 테고, 지문만으로 내려진 모든 판결들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를지도 모른다. 과학수사대들도 더 이상 살인 현장에서 지문을 채취하지 않겠지. 지문채취에 사용하는 입자를 만드는 회사들도 모두 위기에 직면하게 될 거다. 이건 너무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차라리 모두를 위해 내가 제주도에 안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복잡한 심정으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손가락을 올리려는데, 뒤에서 어떤 아저씨가 내게 이야기했다.

‘엄지를 올려요. 엄지’ 

나는 그 이야기를 듣지 않은 것처럼, 엄지를 올리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전에 검지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엄지를 인식기 위에 올렸다. 지문은 열 손가락을 다 찍었는데, 왜 시스템은 엄지만을 사용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걸까? 이런 불합리성을 참고 넘길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다행히 인증이 완료되어, 그 정도 불합리성은 참고 넘기기로 했다. 

인쇄해온 등본을 건네주자 항공사의 직원은 나의 신원을 확인한다는 내용을 담은 – 놀이동산 패스 같은 – 띠를 손목에 둘러주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는 다시 게이트의 그 직원을 마주했다. 그는 내 패스를 확인하고는 들어가도 좋다는 표정으로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당당히 게이트를 통과하며 고개를 돌려 그에게 이야기했다. 

‘저, 이 방법이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프로세스 안에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거든요. 만약 공범이 모든 준비를 해준다면, 다른 사람이 비행기를 타는데 전혀 문제가 없어요.’

그는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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