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빌맨: 크라이베이비

인류는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이고 스스로를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창작물들이 인간 중심으로 스토리가 구성되어 있어요. 인간끼리 사랑을 하고, 인간끼리 싸우고, 외계인을 물리치고, 다른 은하계를 정복하죠. 그리고, 지구에 등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기원을 이야기하고, 그 스토리까지 만들어두고 있다니까요? 알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신과 사람 사이에서 혹은 처녀의 잉태로 등장하기도 하는 그런 류의 이야기들.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 전제 위에서 대부분의 콘텐츠 스토리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가끔 아예 기원을 부정하는 스토리를 만나게 되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는 거죠.

개인적으로 에반게리온이라는 애니메이션을 꽤 좋아했었습니다. 처음 접했을 때는 거대 로봇물 인가보다 했는데, 그 안에 담겨있는 철학이나 세계관의 깊이를 알게 되면서 더욱 깊이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이 애니메이션은 직접 대사와 지문으로 다루는 이야기 뒤로 엄청난 자료들이 존재했고, 그것들을 읽고 연구하는 팬덤도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물론 남이 정리해 놓은 유튜브를 본다던가 하는 식으로 시간을 절약했습니다만.

이 애니는 인류 이전에 이미 지구에는 신적 존재와 그가 창조한 – 이 별의 – 주인이 존재했지만, 어떤 문제로 불완전한 인류가 그를 대체하게 되었다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 아닌 것뿐만이 아니라, 온당한 존재조차 아닌 거죠. 우연히 지구의 주인인 것처럼 되어 버렸지만, 그 불완전성으로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게 되는 존재, 그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그때 이 애니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가장 많이 접했던 의견이 바로 에반게리온이 ‘데빌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거였습니다.


데빌맨은 ‘나가이 고’의 작품으로 무려 50년 전에 발간된 시리즈입니다. 애니, 코믹, 영화 등 다양한 매체로 소개가 되었는데,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작 및 코믹계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어요. 비슷한 시기에 TVA와 코믹이 동시에 진행이 되었지만, 아스카 료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코믹의 스토리가 더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데빌맨을 그 이후 악마가 등장하는 서브컬처 콘텐츠들의 기원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처음에는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데몬과 그 위협으로부터 인간을 구하려는 다크 히어로의 대결 구도로 진행되지만, 사실 지구의 주인은 사탄과 데몬이었다는 상상을 뒤집어엎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지금에야 흔해졌지만 말이죠.)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배포된 나가이 고 50주년 기념 작품인 ‘데빌맨 크라이베이비’는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이 제작을 했습니다. 그는 이때 넷플릭스와의 인연으로 이후 일본 침몰 2020도 제작을 했었죠. ‘데빌맨 크라이베이비’는 데빌맨 코믹의 전 스토리를 담고 있는 완전판이라도 할 수 있는데,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원작의 결말까지 모두 담고 있어요. 2018년 작품이라 SNS를 사용한다던지 하는 설정 같은 것들은 현대적으로 조정되었지만 원작의 스토리를 비교적 충실하게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 관련 작품이 제법 많기 때문에 – 데빌맨 관련작들의 홍수 속에서 일반적으로 명작이라 회자되는 데빌맨을 쉽게 접하고 싶다면, 넷플릭스에서 이 애니메이션을 선택하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다만 여러 충격적인 장면들까지 – 야하거나 잔인하거나 –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에 그런 류의 콘텐츠를 싫어하신다면 피해 가셔야 할 거예요. 물론 원작 자체도 그렇긴 합니다만.

원작의 기본 스토리를 충실히 밟았다는 것 외에도, 음악이 감각적이라던가, 영상이나 연출이 세련되었다는 장점들도 있어서 꽤 퀄리티가 높은 콘텐츠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그림체여서 단숨에 10편을 모두 몰아봤던 기억이 있어요.  

정주행 하다 보면 아무 생각 없는 괴수라고 생각했던 악마들이 점점 인간과 별 다를 바 없고, 반대로 인간들은 혼란 속에서 짐승 같은 본능을 드러내는 것이 서로 대비되며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는데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드러나는 진실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데다가, 그 스케일도 어마어마해서 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판타지 혹은 상상의 산물 같은 가이아 이론이 어쩌면 현재 인류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논리적인 이론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지구 혹은 우주라는 하나의 유기체가 생존하기 위해 제거되어야 하는 ‘불완전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런 철학적인 질문까지는 좀 오버라고 해도, 화려한 영상미와 스피디한 전개 그리고, 심오한 세계관까지 담고 있는 이 애니메이션을 놓치는 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훅훅~ 생각보다 꽤 빨리 볼 수 있으니, ‘남은 주말에 뭘 해야 하지?’하고 고민하시는 분들에게는 살짝 추천해볼까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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