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화매점

‘커피 없으시죠?’

친구가 물었다. 보통 책상 앞에는 전날 마시던 커피가 두세 개씩 놓여 있다. 나는 말없이 그중 하나를 가리켰다.

‘커피는 하루 지나면 마시면 안 돼요. 새로 가지러 가시죠.’

그렇게 방금 들어왔던 건물 정문을 다시 나섰다.

‘저는 늘 여기 가요. 순화매점.’

건물 바로 앞에 있던 카페였지만 나는 이름도 몰랐었다. 노란색 간판 위의 클로버 그림이 귀여운 그곳,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 매장 ‘순화매점’.
커피를 내리는 동안 포스 앞의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니 날씨가 너무 좋았다. 이대로 커피를 들고 노천에서 책이나 읽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아직 하루를 시작도 하기 전인 것이다. 길거리의 은색 볼라도에 부딪치는 햇빛에 눈이 부실 정도라니, 이건 오후 두 시쯤이라 해도 속을 것만 같다.

몇년 전 독일에 갔을 때 길을 잃어 어딘지도 모르는 공원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 공원의 잔디밭 귀퉁이에 잠깐 쉬려고 앉았는데, 그 주변에 클로버가 가득했다. 그 정도라면 확률상 네 잎 클로버 하나쯤은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삼십 분 동안 열심히 뒤졌었다. 그때도 오늘처럼 날씨가 좋았다. 30분 동안 열심히 찾다가 포기하고는 엎어져서 한 시간 동안 낮잠을 잤었는데, 그랬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던 날씨. 이렇게 멋진 날씨에 공원에서 언제 또 자보겠나 싶었는데, 오늘 또 그런 날씨를 서울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멍하니 커피 내리는 것을 보고 있다가 천정을 보니 전등이 예뻤다. 이리저리 앵글을 바꿔가며 사진을 찍었더니 ‘마음에 드세요?’ 한다.

‘네, 예쁘네요.’
‘그거 가지실래요?’

그녀는 오늘이 카페를 정리하는 날이라고 했다. 계약 기간도 만료되었고, 장사가 아주 잘 되는 것도 아니고, 겸사겸사 오늘 오후에 짐을 뺀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카페 하시는 건가요? 어디로 가세요?’
‘호호, 오실 건가요?’

커피를 사러 처음 온 날이 폐업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날씨가 이사하기에 좋은 날이니까.

그녀가 다른 곳에서 더 잘 해내길 바란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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