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벌레와 여름

저녁 시간의 강변역은 정말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때쯤이면 사람도 거의 없어서 열차가 들어올 때를 제외하면 플랫폼이 거의 한 폭의 그림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홀로 고즈넉한 역에 서서 강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아아. 이 정도면 꽤 좋잖아?’ 하고 혼잣말을 하게 된다. 서울이지만 왠지 시골 같은 편안함이 있다고 할까?

하지만 수년 전 여름, 엄청난 수의 날벌레에 강변역이 지배당했던 적이 있었다. 역 주변에 어둠이 깔리고 플랫폼 천정의 라이트가 켜지면 지구 상에 있는 날벌레들이 모두 강변역으로 몰려들었다. 뉴스에도 나올 정도였는데, 아나운서는 그 벌레를 ‘압구정 벌레’라고 했다.(왜 압구정 벌레인지는 설명해주지 않았음) 그 벌레는 2 급수인 물에서만 사는데, 한강의 수질이 좋아졌기 때문에 갑자기 많아졌다는 것이다. 한강이 깨끗해진 것은 축하할만한 일이지만, 징그러운 벌레 수천 마리가 떼로 달려드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필름이나 영상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생생한 공포가 거기에 있었다. 아무리 몸을 흔들어 떨쳐버린다 해도 확률상 몇 마리는 목덜미에 앉아 천천히 피를 빨아댈지도 모른다.(다행히 피는 빨지 않는다고 함) 매일 저녁마다 날벌레의 공격을 마주하다 보니 차라리 냄새나는 한강이 더 정겹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 이듬해 그 날벌레는 강변역에서 자취를 감추고 이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강이 다시 더러워진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다시 저녁의 평화로운 강변역을 돌려받은 이상 그 정도는 참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농담) 어쨌든 요즘 밤의 강변역은 엄청나게 평화로우니 딱히 할 일이 없는 분들이라면 천천히 방문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그렇다고 딱히 할만한 게 있는 데는 아니지만 말이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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