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와 차茶: 번잡함 뒤의 소박한 발견

여의도는 서울의 중심인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내 네이버후드에서 꽤 먼 곳이다. 약간 도로가 붐비는 오후라면 강남역에서 택시로 움직여도 삼사십 분은 꼬박 걸리고, 잠실에서 가려해도 지하철을 몇 번씩 갈아타야 한다. 그런 이유로 같은 서울 안이라도 내겐 태국의 치앙마이나 뉴욕의 소호같이 뉴스나 사진으로만 접하게 되는 가깝고도 먼 지역이랄까? 봄이 되면 주변에서 여의도 공원이나 윤중로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되지만, 딱히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벚꽃이라면 아파트 쓰레기장 옆의 하늘 끝까지 솟아있는 벚꽃나무로 충분하니까. 

그런데, 얼마 전 설명회 세션에 참가하기 위해 여의도를 가게 되었다. 오랜 만에 택시를 한참 타고 있었더니 멀미 때문에 회의고 뭐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겨우 도착해서 정신 좀 차리려 했더니, 점심시간 즈음이어서 그런지 도로에 사람이 무슨 페스티벌 입구처럼 가득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생활을 하는 거지? 주변에 높은 건물들도 엄청나게 많아서 지도를 봐도 내가 대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옛날 사람들이 이야기하던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곳이 바로 이곳인가 보다. 그런데, 왜 하필 코를 베어간다고 했을까? 뭐 어디 쓸데도 없을 것 같은데…


여의도는 이전에는 농사도 짓기 힘든 모래섬이었다. 여의도라는 명칭은 1751년(영조 27년) ‘도성3군문분계총록’에 처음 등장한다고 하는데, 아무도 관심 없겠죠? 어쨌든 일제 강점기 때 비행장이 건설되며 세간의 관심을 받았지만 침수 문제 등으로 폐쇄되고, 70년대부터 여의도 시범아파트, 국회의사당, KBS 신사옥, 증권거래소들이 들어오면서 정치, 경제, 방송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방송국들이 여의도를 떠나며 주변에서 쉽게 연예인을 볼 수 있는 곳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정치, 경제의 중심이며, 서울에서 손꼽히는 부촌이라고 한다. 여의도에 출퇴근하는 친구가 하나 있어 복잡하고 공기 나쁜 곳에 살아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부러워해야 하는 친구였다니… 세상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설명회를 하는 건물의 로비가 – 마치 70년대 건물처럼 – 좁기도 하고, 참석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서 엘리베이터가 엄청나게 붐볐다. 수없이 열리고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본 후에야 겨우 설명회장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 아직 설명회는 시작 전이었다. 같이 간 친구들과 설명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행사장 옆에 과자와 음료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나무 책상에 보라색 천을 씌워둔 소박한 전시대 위에,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러운 과자와 차 – 친구들이 고급스러운 것이라고 알려줌 – 가 놓여있었다. 별생각 없이 과자 하나는 입에 물고 티백 하나를 들었는데, 설명회를 시작하는 바람에 티백을 주머니에 넣고 행사장으로 들어갔었다. 

이곳부터는 여의도 이야기가 아니라 차 이야기.

그렇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어제 가방 안에서 그 차를 발견했다. 늘 마시던 커피 대신 뜨거운 물에 그 티백을 담갔는데, 세상에 향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너무 고급스러워서 손가락을 푹 담가서는 손목, 목, 옷에 묻히고 싶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차는 향과 맛의 괴리가 너무 커 음료라기보다는 향초나 디퓨저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맛까지 텁텁하지 않고 깔끔해서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날 한번 더 물을 부어 마시고는, 티백을 그대로 컵에 담은 채로 캐비닛에 넣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다시 물을 채웠다. 향은 좀 줄긴 했지만, 그래도 마실 만했다. 그러다가 컵을 손으로 쳐 넘어뜨리는 바람에 책상, 키보드에 차를 쏟고 말았다. 차가 너무 아까웠다. 바로 다시 컵에 물을 받아왔지만 향이 현저히 줄어서 가슴이 아팠다는 이야기. 

다음번에 그곳에서 또 설명회를 하면 꼭 다시 참석할 것이다.(그래도, 살 생각은 아직 안 함)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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