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이들은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 기묘할 정도로 아주 작은 디테일에 집착하죠. 마치 깊은 밤, 홀로 낡은 레코드판의 보이지 않는 홈을 파내듯, 그 미세한 틈새에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의미를 섬세하게 밀어 넣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예술가, 크리에이터라 부르고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심연의 디테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눈앞에 놓인 결과물을 바라보며 좋다고 느낄 뿐이에요.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크리에이터가 숨겨둔 디테일의 미세한 파동이 컨슈머의 무의식을 흔들어 놓았다는 증거니까. 완벽하게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그 느낌은 전달되는 거예요. 무수한 인류의 콘텐츠는 그런 방식으로 사회 속에서 기분 좋은 균형을 잡아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세상의 공기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걸 느끼지 않나요? 모든 데이터를 삼켜 일반화해 내고 공장처럼 결과물을 뱉어내는 존재가 등장하면서부터… 물론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것들에 디테일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넘칠 정도로 과한 경우도 있어요. 문제는 정작 ‘꼭 있어야 할 그 자리’에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섬세한 체온이 닿아야 할 곳이 기묘하게 텅 비어있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나의 의도대로, 미세하게 통제할 수 없습니다.
최근 인공지능으로 만든 영상들을 보고 있으면 서늘한 공포감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앞으로는 이런 것들만 보며 살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
하게 된달까요? 이유는 명백합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깎아내며 들이는 시간과 수고 없이도, 빠르고 효과적으로 그럴듯한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마치 컨베이어 벨트가 지배하고 있는 양산量産의 상징, 공장처럼 말이죠.
사람들은 효율의 법칙에 의해 점점 더 인공지능에 의존하게 되고, 결국 우리는 인간만이 불어넣을 수 있었던 그 미묘하고도 불규칙한 디테일을 콘텐츠에서 점점 마주할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두꺼운 소설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대신 깔끔하게 요약된 줄거리만 보게 되듯 말이에요.
콘텐츠의 아웃라인만 마주하게 되는 건조하고 디테일이 결여된 삶이 과연 우리가 바라던 멋진 세계일까. 강윤성의 ‘중간계’를 보고 나니 머리가 복잡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