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개설

전날 늦게 잤는데도 불구하고 시차 때문에 아홉 시 전에 눈이 떠졌다. 시차도 시차지만 호텔의 침대가 너무 푹신푹신해서 허리가 아파 오래 누워있을 수가 없다. 대충 샤워를 하고 침대 위에 걸터앉아 오늘 할 일을 정리하는데, 무엇보다도 전화 개설이 시급했다. 외부에서 인터넷 사용이 불가능하니 길을 찾는 것도, 집을 구하는 것도, 심지어는 밥을 먹고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것도 쉽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왔는지 스스로 생각해봐도 놀랄 정도다. 

마침 친구 중 하나가 근처 – 라고 해봤자 산호세 – 에 살고 있어 물어보니 Cricket에 가서 유심을 사라고 한다. 검색해보니 Cricket은 AT&T라는 미국의 기간통신사업자의 망을 빌려 서비스를 하는 별정통신 사업자로, 통신 품질도 괜찮고 가격도 저렴하단다. 나는 추천받으면 별다른 의심 없이 바로 결정해버리는 스타일로, 더 이상 알아보지 않고 근처의 Cricket 매장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마침 롬바드 스트리트에 하나 있는데 호텔 근처에서 뮤니(샌프란시스코의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다.


옷을 주섬주섬 걸친 후 가벼운 마음으로 호텔을 나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었다. 가을이라 약간 선선한데도 반팔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꽤 있다. 내 기준에는 분명히 그 정도는 아닌데, 사람들은 추워 닭살이 돋든 말든 팔뚝을 내놓고 씩씩하게 걸어 다닌다. 하긴 이래야 캘리포니아지. 다행히 정류장은 생각보다 가까왔다. 

버스에 올라 요금을 건네니, 조지 포먼(미국의 권투선수)처럼 생긴 운전사 아저씨가 탑승 시간이 표시된 종이 티켓을 건네주며 엄지를 들어준다. 나도 – 태어나서 처음으로 – 엄지를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반응하지 않으면 스트레이트 펀치가 날아올지도 모르니까.(시간 표시는 대부분 넉넉하게 해 주기 때문에 반나절 – 원래는 최초 승차 후 두 시간 동안만 재 탑승이 가능 – 은 너끈히 탈 수 있었지만, 2016년 하반기에 티켓 발권이 디지털 인쇄기로 대체되어 그런 낭만은 사라지고 말았음)

조금 지나니 버스는 어느새 마천루들을 뒤로하고, 그림 같은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U2의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이란 곡이 딱 어울리는 그런 거리.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걷다 보니 길 가에 낡은 간판의 Criket 매장이 보였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친절이 넘치는 점원이 밝게 말을 걸어온다.

‘안녕!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유심을 하나 사고 싶은데…
‘아! 여행자시군요. 샌프란시스코에 잘 오셨어요!’
– 아니, 여행자는 아니에요.
‘마켓 스트리트에 가시면 블루밍데일즈 같은 쇼핑 스폿이 아주 많아요!’
– 저는 여행이 아니라 일로 왔는데… 유심 좀 보여주세요.
‘그곳 근처 유니온스퀘어에서 전차를 타시면 피셔맨스 와프로 가실 수 있고요! 멋진 곳이에요!’
여행자가 아니라니까요. 유심 좀…
‘그 곳에서 클램 차우더는 꼭 드셔 보세요!’
– …..

과하게 친절한 점원의 도움으로 유심을 구매한 후, 스마트폰에 끼우니 바로 수신 안테나가 차오르며 전화와 인터넷이 가능해진다. 천천히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며 시계를 보니 아직도 하루가 많이 남아있다. 

‘돌아가는 버스는 무료로 타고 갈 수 있겠는걸?’

나도 모르게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멍하니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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