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해
요즘 내 상태를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지루하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살았던 나였다. 사람들을 만나든, 혼자 시간을 보내든 늘 뭔가 할 것들이 넘쳤다. 그것이 생산적이거나 의미가 있는 일들이었냐고 물어본다면 고민이 될 것 같긴 하지만, 적어도 일정 시간을 물리적으로 때우는 데는 충분했다. 물론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해서 지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지루하다는 단어는 사전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같은 상태가 오래 계속되어 따분하고 싫증이 나는 경우’를 말한다. 품사는 형용사이므로 주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놓이게 되는 상태를 묘사한다.
요즘 인류가 느끼는 지루함의 근원은 아마도 코로나에 의한 팬데믹 상황일 거다. 벌써 이 년 차가 되었으니 같은 상태가 오래 계속되어 싫증이 나는 경우’에 딱 들어맞는다. 아무리 즐거운 일을 찾는다 해도 사회 전반의 기저 분위기 자체가 우울하니 그 기분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패턴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어도 늘 기분이 처졌다. 집중하고 있어도 지루했다. 계속 손을 놀려도 지루했다. 머릿속으로 뭔가를 계속 생각해도 지루했다. 심지어는 Foster the People의 ‘Houdini’를 듣고 있어도 너무나 지루했다.
어떻게 보면 지루함은 죽음 직전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지루함과 죽음 사이를 연결할 만한 적당한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지루함과 죽음. 허무하고, 시시하며, 의미 없이 공허한 상태는 소멸로 귀결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승환과 선우정아의 ‘어쩜’이라는 곡을 듣고 있으면 ‘지루함’이 형상화되어 머릿속에 가득해진다. 이 곡의 주인공들은 후회가 가득하다. 사실 후회라기보다는 무심한 상대가 짜증 나고 서운한 거다. 그래서 ‘허무히 젊음을 너란 애에게 다 써버렸을까’라고 말한다. 지루하다고 말한다.
이곡을 들으며 ‘아, 팬데믹 이전에도 지루함이 있었지’ 하고 무릎을 탁 쳤다. 분명히 나도 이런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으니까. 정도는 다르지만 분명히 비슷하게 무기력하고, 모든 게 시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상황은 변했고, 지루함은 사라졌다. 이후에도 여러 상황 속에서 몇 번 더 지루함을 느꼈다가 다시 그것을 잊곤 했다. 중요한 건 지루함마다 모두 끝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루함 그 자체도 함께 잊힌다는 거였다.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지루함을 배가시키는 상황이 중첩될 수도 있고, 그대로 영원히 이어질 수도 있을 테지. 이렇게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지루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누가 뭐래도 하나뿐이다. 버티는 것. 절대적인 지루함을 잊을 수 있도록 현재에 충실하며 고린 상태로 견뎌내는 것.
어쨌든, 팬데믹이 끝나든, 내가 죽든’ 하는 마음으로 다들 잘 견뎌냈으면 좋겠다.(너무 극단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