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앞에는 ‘나는 기린 해부학자입니다’라는 책이 놓여있다. 며칠 동안 나는 이 책을 책상 위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다.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던 건 몇 년 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샌프란시스코 동물원에서 평야를 가로질러 뛰어가는 기린을 봤던 기억 때문이었다. 그 장면은 아직도 눈을 감으면 떠오를 정도로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물론 그전에는 실제로 기린이 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방송에서는 몇 번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는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날 내 눈앞에서 머리를 꼿꼿이 들고 우아하게 달리던 기린은 한마디로 경이驚異 그 자체였다. 달리느라 정신없어 보이는 몸통 아래와는 달리, 목 위쪽은 한없이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 목은 한치의 흔들림 조차 없었다. 마치 그 피부 안쪽에 단 하나의 목뼈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표지의 설명글을 보면 저자인 군지 메구는 10년간 30여 마리의 기린을 해부하고, 결국 기린의 제1흉추가 ‘8번째 목뼈’로 기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동물학자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발견일 수도 있겠지만, 일반인인 나로서는 그것이 10년을 바칠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죄송). 물론 그것 말고도 몇 가지 더 발견했을 수도 있고, 연구 외에도 여러 다른 개인적 취미생활로 소소한 행복을 추구했을 수도 있다(꼭 그랬길 바람).
비단 그녀뿐 아니라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증명도 못할 원자구조 가설을 내놓았던 보어나, 고생 끝에 결국 푸앵카레의 추측을 증명했던 페렐만도 있다.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사실 척추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인 인류人類는 비슷한 삶을 이어오며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준비한 퍼즐 조각들은 멋진 그림으로 맞춰지기도 하고, 완성된 그림 옆쪽에 나뒹구는 남은 조각이 되기도 했겠지. 그런 건 퍼즐 조각을 만들 때에는 알 수 없다. 그냥 성실하게 준비할 뿐이다. 그런 것을 보면 인간은 참 짠하다. 누구라도 두 팔 가득 안고 수고한다 말해주고 싶어 진다.
그건 그렇고, 내가 이 책을 쉽게 집어 들지 못하는 이유는 다 읽고 났을 때 기린이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우아하게 달리는 것이 단지 ‘제1흉추가 8번째 목뼈처럼 작동하기 때문’ 같은 단순 명제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은 경이로운 광경, 그것 만으로 충분하니까. 물론 책이 읽기 귀찮은 것도 있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