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들을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열두 시가 넘어버렸다.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시계를 보고 난 후부터 허기가 지기 시작한다. 책 한 권을 들고 요기療飢를 때우기 위해 건물을 나서니 밖은 – 아침과는 다르게 – 잔뜩 흐려 있다. 우산을 가지러 다시 올라갈 생각은 없었지만, 가지고 내려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하긴 딱히 떠올릴 만한 다른 일도 없다.
건물에서 세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국밥집은 혼점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서너 명이 함께 온 손님들도 있지만 서로 대화를 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한다. 앉을자리가 없어 가만히 입구에 서 있었더니 사장님께서 자리가 금방 나니 주문을 하란다. 소머리 국밥을 주문했다.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데 자리가 났다고 알려주는 친절한 사장님. 뒤를 돌아보니 태초부터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던 것처럼 비어있는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부지런한 점원은 손님이 일어나기도 전에 벌써 자리를 다 치웠나 보다.
자리에 앉자마자 미리 주문해 두었던 식사가 배달되었고,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새로운 식당에 익숙해질 새도 없이, 잔에 물을 채울 시간도 없이 식사는 시작된다. 올해 처음 보는 조밥이었다. 흰쌀밥 사이사이에 노란 조가 보기 좋은 비율로 섞여 있다. 제법 예뻐서 먹기 아까울 정도다. 이름이 좀 민망한데? 머릿속으로 몇 번 발음해 보고는 사람들에겐 이야기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대충 식사를 하고 나와 다시 건물 쪽으로 걷다 보니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사실 커피보다는 멍 때리며 조금 앉아있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돌아가면 해야 할 일들에 떠밀려 오후를 보내게 될 테니까.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이 보여 젤리나 하나 살까 하고 들어갔는데 포스 옆에 커피 머신이 있다. GET 커피라… 종이컵에 ‘이 커피를 구입하는 것은 환경과 농업공동체를 보호하는데 도움을 줍니다’라고 씌어있었다. 개구리 마스코트도 꽤 귀엽다. 머신 옆에는 지금까지 마셨던 어떤 커피보다도 복잡한 맛을 자랑하는 문구로 가득했다. 내가 태어나서 농업공동체를 보호해 본 적이 있었나? 이 커피로 그런 대의명분도 함께 할 수 있다니!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결제먼저 해드릴게요. 컵을 머신 위에 올리시고 아메리카노 버튼을 누르면 됩니다
친절한 점원의 디렉션대로 천오백 원을 결재하고 머신 위에 종이컵을 올렸다. 일하던 건물 안에도 비슷한 커피머신이 있지만 커피를 내리면 자리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돈으로 지불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그래봤자 천오백 원이다.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머신의 주변을 살펴보니 바닐라 라테도 있다. 점원은 아메리카노를 내리고 바닐라 라테 분말을 넣으면 된다고 했다.
분말에 뜨거운 물만 넣어 드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하며 미소 짓는 점원. 따라 웃을 수 없었던 게, 나 같아도 그렇게 마셨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셨던 손님들에게 유감遺憾 표하며, 다음에는 바닐라 라테를 마셔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피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커피를 들고 나오는데 편의점 옆에 손바닥만 한 테이블과 철제 의자가 있다. 만년필 뚜껑을 닫듯, 포스에 카드를 밀어 넣듯 내 몸이 딸깍 하고 끼워질 것만 같은 작은 공간. 그 자리에 몸을 밀어 넣고는 읽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어가는 ’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를 펼쳤다. 아무래도 오늘은 꽤 많이 읽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비가 막 그친 싸늘한 거리에 봄기운이 밀려온다.